나눔과 비움-황대권


살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절망과 고통의 시간을 갖게 마련이다. 때로는 그 시간이 잠시 스쳐지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오랜 세월을 두고 괴롭히기도 한다. 물론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명한 사람이라면 후자의 경우를 되도록 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처지를 즐기지는 않더라도 마음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트레스 속에서 몸과 마음이 뒤틀어질 대로 뒤틀어져 정상적인 상태가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지는 경우이다. 마치 나뭇가지를 잡아당겼다가 바로 놓으면 제자리로 돌아가지만 오랫동안 붙들어 매어두면 휜 채로 굳어버리는 것과 같다.


나는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별 어려움을 모르고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타의에 의해 인생 차체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극심한 혼란과 좌절을 겪었다. 군사정권의 폭압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공명심에 불타는 공안기관의 수사관들에 의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무기징역을 살게 된 것이다. 그 때 나는 한창 열심히 공부하는 유학생이었다. 일류대학을 나와 교수의 꿈을 안고 해외에서 공부하던 학생이 영문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간첩이 되어 신문지상에 대문짝하게 나왔으니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처음엔 너무도 기가 막혀 마치 또 다른 내가 스스로 주인공이 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진짜 영화였다면 상영시간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데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내 손에 채워진 수갑은 그대로였다. (사형을 구형받으면 수갑을 차고 생활하게 되어 있었다. 최종 선고는 무기징역.) 어떻게 인생이 이렇게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 있을까? 어떻게 명색이 법치국가라는 곳에서 국가공무원에 의한 불법감금과 불법고문이 태연히 자행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도 더 화가 났던 것은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도 누구하나 ‘아니오’ 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외부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 콘크리트 독방에 갇힌 나는 그야말로 절망의 심연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처음 1년 동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고문의 후유증과 사투를 벌였다. 안기부 지하실에서 무려 60일 동안 고문을 받으며 온 몸이 망신창이가 되었던 것이다. 붓거나 멍든 외상은 몇 개월 만에 회복되었지만 편두통이나 협심증같은 내상은 좀처럼 낫질 않았다. 특히 수사기간 내내 집중적으로 두드려 맞은 발바닥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신경발작이 일어났다. 한번 발작이 시작되면 다리를 꼭 끌어안고 방안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그래도 세월이 약이라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제 정신이 돌아오자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이후로 약 4년 동안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비록 독방에 갇혀있기는 하지만 단식투쟁을 비롯해 할 수 있는 온갖 짓을 다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제로. 아무 것도 없었다. 세상은 그런대로 잘 굴러가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갇혀있는 신세였다. 그러는 사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토록 귀여워하던 손주의 이름만 애타게 부르다가 얼굴 한번 못보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 게다가 유학시절 만나 결혼했던 애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무기수에게는 이혼을 거부할 권리도 없었다. 이제 나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할 일도 없어졌다.


극심한 혼돈 속에 하릴없이 종이로 바둑을 만들어 혼자서 기보를 보며 바둑을 두었다. 하루는 벽에 기대어 기보를 읽고 있는데 갑자기 심장의 박동이 멎는 것이었다. 가슴이 마치 송곳에 찔리는 듯 아프더니 잠시 후에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협심증이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 안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당시의 내 몸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억울이고 뭐고 간에 일단은 살아야했다. 나는 머릿속을 깨끗이 지우기로 했다. 고민하고 원망해 보아야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 사이 수십 번도 더 확인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포기하고 오로지 나의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모든 시간을 쓰기로 했다. 자연의학을 공부하다가 지천에 깔린 야생초들이 모두 약초임을 발견하고 교도소 운동장 구석에 야생초 화단을 만들어 풀들을 가꾸기 시작했다. 골치 아픈 사회과학 서적 읽기를 줄이고 위대한 지혜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특히 기독교와 도교의 경전에 탐닉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리고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반드시 기도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매일 규칙적으로 단전호흡을 하고 도인술(導引術)을 익혔다. 운동시간에 밖으로 나가면 화단에 달라붙어 야생초를 관찰하고 식생을 연구하는 한편 잘 자란 풀들을 뜯어 무쳐먹고 삭혀먹고 차로 끓여 먹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렀다.


어느날 운동장에 나가 밭을 매다가 문득 나의 몸을 점검해 보았다. 말짱했다.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힘이 솟았다. 다시 건강해진 것이다. 아니 ‘다시’가 아니라 사회에 있을 때 보다 더 건강해졌다. 그리고 그 무렵에 밖에서는 국내외적으로 양심수 석방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세계적 NGO인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와 국제펜클럽(International PEN.)에서 나를 ‘국제적 양심수’와 ‘투옥된 문인’으로 지정하여 석방운동을 펼쳐주는 바람에 세계 각지에서 위문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감옥생활이 살만했다. 아니 어떤 측면에서는 감옥생활을 즐기기까지 했다. 전에는 감옥이 투쟁의 장소였고 하루빨리 나가야할 곳이었지만 이제는 자아를 실현하는 장소가 되었다. 방안에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이 변화는 무엇인가? 내가 그렇게 몸부림 칠 때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더니 막상 모든 걸 포기하고 내 안의 평화를 추구하면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내가 일으킨 것일까, 아니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일까? 혹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자비를 베푸신 것일까? 물론 아무런 의문 없이 주어진 그대로 살아가도 그만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합리화의 천재.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논거를 가지고 있어야 안심하는 특이한 동물이다. 나는 오랜 사색 끝에 다음과 같이 정리를 했다. 이것은 나의 경험을 일반화한 것일 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고는 감히 주장하지 않겠다. 그래도 혹시 도움이 될까하여 참고삼아 적어본다.


첫째, 세상은 내가 변한만큼 변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변하지 않고 아집에 사로잡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들이대면 댈수록 세상일은 내 의도와 멀어진다.

둘째, 나의 변화는 얼마나 자신을 비우느냐에 달려있다. 자신을 비우면 비울수록 변화는 쉬워진다. 그것은 무거운 짐을 가진 자가 멀리가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셋째, 세상은 본디 악하거나 선하지도 않다. 내가 악하게 보면 악하고 선하게 보면 선할 뿐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올바르고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넷째, 위와 같은 태도로 변화에 전적으로 내맡기면 ‘반드시’ 좋은 변화가 내게 온다. 때로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좋은 변화로 가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면 결국 좋게 변한다.


말로는 이렇게 썼지만 사실 자신을 비운다든지 변화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끈질긴 노력과 수행심이 없으면 늘 그 자리에서 맴돌 뿐이다. 그러나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는 법. 그리고 첫술에 배가 부르는 일도 없다. 일상의 삶 속에서 자그마한 일을 가지고 비움과 변화를 위한 훈련을 반복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내공이 쌓인다.


세상은 한때 나를 버렸지만 그것은 오히려 새로운 나로 거듭나기 위한 기회가 되었다. 만약 내가 그때에 억울함에 사로잡혀 세상을 탓하며 시간을 보냈다면 13년의 독방생활은 나를 어떤 괴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출소 후 사람들은 내가 성공했다고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말이고 나는 여전히 대긍정의 세계를 향하여 길을 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황대권님은 이 글을 지난 4월 푸르메재단에 기고해주셨습니다.


푸르메재단에 기고해 주신 분들의 글을 묶어 8월 말 창해출판사에서 <포기하지말아요>란 단행본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황대권_

1955년 서울생. 서울농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제3세계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 국제사면위원회의 초청으로 영국에 있는 슈마허 대학과 임페리얼 대학에서 생태디자인과 농업생태학을 공부했다. 현재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과 교육위원장으로 생명평화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생태 공동체와 농업에 관한 글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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