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필(분당이우학교 교장선생님)
뜻은 좋은데, 되겠냐?
내게도 가슴 벅찬 고등학교 시절이 있었다. 토요일이면 봉사서클에서
여고생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빠지기도 했고, 독서토론회를 만들어 철학사를 시대 순으로 훑어보려 했지만 중세에서 막혔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그 시절은 암울한 유신독재였기에 세상에 대해 일찍 눈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난 함석헌 옹을 찾아 뵙고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대학을 입학하기 전에 난 대학에서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는 사회과학을 공부하여
세상을 이해해 보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입학식도 하기 전 이미 몇몇 서클에 스카우트 되어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결국 대학
1년을 못 채우고 운동으로 제적되었고, 이듬해 반정부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건 고난의 시작이었다. 1979년 이듬해 석방된 나는 곧바로 군대에 징집되었다. 그런데 하필 내가 입대하던 날 밤, 젊은이들이 온 몸으로 반대하던 유신독재가 막을 내렸다. 바로 10.26이었기 때문이다.
불운은 군대에도 따라 다녔다. 논산 훈련소를 마치고 자대에 배치되는 날 쿠데타가 일어났다. 12.12사태였다. 비상사태 속에서 시작한 군 생활은 장장 33개월 동안 계속됐다. 정말 원 없이 군대생활을 한 셈이다. 내가 근무한 부대는 155mm 포병부대였다. 대학생 출신이라 상부에서는 나를 행정병으로 차출하고자 했지만 버티고 버텨서 다시 포병 사수로 되돌아 왔다. 이왕 군대 생활을 할 바에는 남들과 똑같이 바닥에서 박박 기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대하면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할 작정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선반공이 되고 싶었다. 군대에서도 비슷한 원리로 작동되는 대포 조작에 공을 많이 들였다. 이 과정에서 삼천포 출신의 농사꾼으로 지금도 농민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이선복을 만났는데 그에게서 삽질, 곡괭이질, 낫질까지 손발로 하는 노동의 대부분을 배웠다.
군 제대는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 본격적인 '위장취업’을 위해 청계천에 있는 작은 공장을 찾았다. 내 보직은 선반공 시다였다. 보통 시다는 10대 청소년들이었는데 내가 군대 155mm 사수에 포술 경연대회에도 나간 경력을 내세우며 의욕적으로 말하니까 마지못해 받아주었다. 선반 경력 20년의 사장은 옆에서 신문을 보면서도 선반 소리로도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지 지적하는 고수였다. 어느 날 내가 도면을 엉뚱하게 해석해 주문한 물건을 망쳐놓았다. 사장은 다짜고짜 “너, 중학교는 나왔니? 일은 머리를 써야 하는 거야?”하고 야단을 쳤다. 내가 군대까지 갔다 온 나이든 놈이라고 봐주어서 그렇지 아마 망치가 날아왔을 것이다.
그 후 오랜 염원이었던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보직은 역시 선반공이었다. 노동경력과 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1989년부터 전국의 노동운동 조직을 통합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노동운동은 각 지역 별로 써클 수준이었다. 그 해 말 아내는 구속되고 내가 집중 수배를 받는 상태에서 지역 써클을 전국적으로 통합하는 임무를 맡았다. 강원도 춘천, 원주, 태백, 정선, 동해. 충청도 대전, 청주, 천안. 전라도 광주, 목포, 전주, 이리. 경상도의 부산, 대구, 울산, 구미 등을 두루 다니며 사람을 만나며 조직을 꾸려나갔다. 이때의 경험과 만난 사람들은 나중에 교육운동으로 발전해 이우학교 설립을 준비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됐다.
수배 상태에서 이동하기 좋은 방법이 낚시꾼으로 가장하는 것이었다. 원주의 한 저수지에 텐트를 치고 춘천, 태백, 원주를 돌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을 두어서 일까, 이 때 배운 낚시취미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상생(相生)을 이야기하면서 물고기를 취미로 잡느냐’고 아내에게 타박을 받으면서도 머리가 복잡할 때면 지금도 낚싯대를 짊어지고 물가로 나선다.
민중당 조직국장과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정치가 내 성향에도 어울리지 않고 능력도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긴 호흡을 가지고 의미 있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됐다.
그 당시 새롭게 대두된 공동체운동이나 생태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교육에 눈뜨게 됐다. 입시에 찌든 교육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교육을 고민하게 됐다. 그래서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철학교실’이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그 동안 사회운동을 하면서 사람을 조직하고 변화시키는 일을 20년 가까이 해왔으니 큰 테두리에서 교육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철학교실’은 이후 세우게 될 대안 학교의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시험하는 장이 되었다. 이런
결실들이 조금씩 맺어져 1997년 드디어 분당에 대안학교를 세우고자 뜻을 모은 선생님들과 모임을 시작했다. 10여 년 가까이 사회운동을 같이 했던 동료들이 중심이 되었다. 뒤늦게 국내외 대안학교 사례와 교육사상, 교육이론, 공동체운동, 생태사상 등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간디 학교, 풀무학교, 성지학교 등을 방문해 도움을 받으면서 양희규 선생님과 김창수 선생님 등 대안학교를 세우신
분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들로부터 조언을 들으면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 결국 앞서간 분들의 피와 땀 위에 조금 보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학교 부지를 알아보기 위해 3년 동안 전국을 헤매었다. 특히 분당에서 30분 이내에 있는 1만~2만 평 사이의 땅을 100개 이상 보러 다녔다. 처음에는 학교와 마을을 함께 만들 계획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단계적 접근을 하기로 결정했다. 학교 부지도 결국 성남시 안에 정하기로 결정했다.
100억 원이 넘는 설립 자금과 각종 인허가를 쥐고 있는 관공서의 높은 벽을 고려하면 우리가 가진 것은 빚으로 때운 1억 5천만 원의 계약금과 우리의 열정, 새로운 교육의 구상, 그리고 지나 온 삶의 진정성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그 동안 많은 분들을 만났다. 모두들 “뜻은 좋은데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하고 걱정했다. 결국 함께 한 사람들은 우리와 지난 시대를 함께 겪어낸 사람들과 이들을 지켜본 친구들이다.
드디어 4년만인 2001년 분당구 동원동에 땅을 계약하고 ‘이우학교 설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다. 고문을 맡으신 이명현 교수님과 강지원 변호사님의 역할이 중요했다. 이명현 선생님이 조직 구성을 하면서 ‘병풍론’을 말씀 하시고 당신께서 고문을 맡겠다고 했다. 조직의 얼굴로 이름을 올리고 대접만 받으려는 모습을 경계하면서 모범을 보이셨다.
성남시 도시계획위원회의 학교시설결정 과정, 경기도, 성남시와의 인접도로 협의 과정, 경기도 교육청과의 학교설립 인가 과정 등 관료제의 두터운 벽을 뚫는 과정은 초기부터 참여한 사람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교육청과 관공서에서는 사립학교를 설립하겠다고 하면 교육자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 브로커로 간주해 온갖 의심부터 했다.
그 과정에서 두 분의 역할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강 변호사님이 늘 농담 삼아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경로사상도 없느냐? 노인네들한테 뒤에서 명령만 내리고!”였다. 그런데 그 말씀이 농담이 아니었다. 그 바쁜 분들이 만사 제쳐두고 현안만 있으면 밤이고 낮이고 뛰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제 이우학교가 개교를 준비한 지 개교 5년이 지났다. 힘들 때 마다 처음 학교를 준비할 때를 되돌아본다. 너무 거창한 구상들을 현실에 접목시키느라 많은 분들이 고생했다. 꿈이 현실로 되는 과정은 많은 이의 고통과 지루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다시 묻게 된다. “우리의 뜻은 정말 좋은가?”
입시 지옥과 경쟁의 도가니 속에서 미래를 준비할 겨를 없이 시들어가는 우리의 청소년들에게 밝은 미래를 열어주려면 이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위학교의 변화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뜻이 분명하고, 그것을 감당하고자 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들이 현실을 조금씩 바꾼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그만큼 또 함께 감당할 수 있다. 한두 해 열심히 뛰다가 아니다 싶으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곳으로 약삭빠르게 빠져나가는 재주꾼이 아니라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무던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우리 사회에서는 믿기 때문이다.
정광필
분당에 있는 도시형 대안학교인 <이우학교>의 교장선생님입니다. 대학 1년 때 유신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구속, 제적된 후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정치운동을 하며 끊임없이 우리사회의 대안을 찾았습니다. 입시교육 아래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철학과 글쓰기, 생태, 환경을 중심으로 한 대안학교를 만들기로 결심한 뒤 결실이 맺어져 현재 이우학교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