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흘린 산 사나이 엄홍길
5월 초 ‘산사나이’ 엄홍길 대장과 함께 눈 덮인 백두산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이번 행사는 엄홍길 대장이 푸르메재단 및 장애어린이 합창단 <에벤젤리>에 소속된 어린이들과 함께 백두산을 오르면서 용기를 주자는 취지에서 열렸다.
그런데 실상 어린이들보다 행사를 주최한 어른들이 더 설레이는 등반이었다. 1985년부터 히말라야를 오르기 시작해 8000미터 이상 16좌를 등정한 세계적인 산악인과 민족의 영산을 오른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였기 때문이다.
3박 4일간 같이 생활하며 옆에서 지켜본 ‘인간 엄홍길’은 동네 어귀에서 만날 수 있는 아저씨 같이 푸근한 사람이었다. 크지 않은 키에 어눌한 말투, 어린이 보다 오히려 천진난만한 표정을 한 그가 산에만 가면 어떻게 그렇게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날아갈듯 휘몰아치는 눈 덮인 백두산 정상에서,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백두산 천지에서 엄홍길 대장과 많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다. 적지 않은 행운이었다.
그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 높고 험한 산을 오르는 것이냐’였다. 질문을 받자 그의 표정이 갑자기 단호해졌다. “저는 그동안 산을 오르며 수많은 고통과 좌절을 경험했지만 오르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제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운명에 따르기 위해 저는 기꺼이 산을 오릅니다” 대답에 비장함이 서려있었다.
언제 가장 행복했을까. “더 말할 것도 없이 1988년 천신만고 끝에 8850미터의 에베레스트를 올랐을 때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산을 정복했다는 기쁨 때문에 정신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히말라야가 나에게 오르는 것을 허락했다는 느낌이 들면서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로 정말 겸손해 졌다고 할까요. 그래도 그 첫 순간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인생과 청춘은 오로지 흰산 히말라야에 바쳐졌다. 아니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삶이라고 했다. 등정을 인생의 목표로 정하고 산 속에 많은 친구를 묻어야 했던 엄홍길.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부상을 당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애증의 산 ‘에베레스트’가 그에게 삶의 전부였던 것인가.
우리는 연길시의 작은 맥주집에서 연변 맥주로 목을 축이고 있었다.
그에게 힘들었던 순간을 물었다. 내 질문을 듣는 순간 그는 조용히 내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4번째 히말라야 등정 때의 얘기를 들려줬다. “셰르파 두 명이 7600미터 지점에서 갑자기 추락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로프를 잡았습니다. 잘못하면 함께 추락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 동지였으니까요. 손이 찢어지고 발목에 로프가 감기면서 180도 꺾여 뒤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발목이 잘려 덜렁덜렁할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고 아래로 구르고, 구르지 못하면 기어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왔지요. 제가 살아온 것을 보고 모두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제가 앞으로 걸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등산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지만 저는 결국 1년 후에 다시 히말라야에 섰습니다”
내가 물었다.“그때가 살아오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습니까” “
그의 눈빛이 흐려지더니 갑자기“노래를 하나 불러도 되겠느냐”고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70년대 후반 한창 유행했던 그룹 <휘버스>의 ‘가버린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특유의 저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하얀날개를 휘저으며 구름사이로 떠오네
떠나가버린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사라져버린 그 사람
다시는 못올 머나먼 길 떠나갔다네
한없이 넓은 가슴으로 온 세상을 사랑하다
날리는 눈을 따라서 떠나가버렸네
울어봐도 오지않고 불러봐도 대답없네
눈속에서 영원히 잠이들었네
“1999년 5번째 에베레스트 등반을 했을 때입니다. 스페인 등반대와 여자 후배인 지현옥 대원과 함께 등정에 나섰습니다. 현옥이는 8000미터 에베레스트 4개봉을 등정한 발군의 실력을 가진 대원이었습니다. 마치 친동생과 같았지요. 저는 악천후를 뚫고 안나푸르나에 태극기를 꽂고 내려오다 현옥이를 만났습니다. 현옥이는 등정 속도가 느리다며 제가 정상을 밟고 내려왔다는 사실 때문에 압박감을 느낀 것 같았습니다. 그때 말렸어야 했는데....그는 정상을 밟은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길지 않은 울음을 토했다.
엄홍길 대장의 앞으로 계획은 무엇일까. 그는 ‘엄홍길 휴먼재단’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재단에서 할 일은 우선 히말라야 산속에 묻혀있는 8명의 동료들을 하루 빨리 찾는 것이다. 이들 모두를 고국으로 데려오는 것이 1차적인 목표라고 한다.
그리고 네팔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도 말했다. 히말라야를 오르면서 만났던 아이들은 종이 한 장, 연필 한 자루가 부족한 상황이다. 어린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인생의 후반기를 맞는 그의 계획이다.
2001년부터 유엔산하 구호단체인 <플랜코리아>의 홍보대사로 일하면서 네팔어린이와의 자매결연 사업을 하면서 ‘엄홍길 휴먼재단’을 구상했다고 한다.
그는 2005년 초중고학생 10여명을 데리고 히말라야에 다녀왔다. 이때 그가 체험한 것을 우리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세태가 너무 편한 것, 쉬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물질문명에 너무 찌들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너무 나약합니다. 이건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이런 반성에서 그는 최근 우리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인간성을 회복하기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산을 내려오니 물질문명세계에 갇혀있는 우리 청소년들이 너무 가여워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공부 쫓기고 컴퓨터에 갇혀서 서서히 정신이 고갈돼 가는 우리아이들에게 대자연을 접할 수 있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 서면 삶이 얼마나 신비하고 위대한 것인지, 공부감옥에 갇혀 있는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이번의 백두산 등정 프로그램도 엄홍길 대장의 산을 통해 청소년을 만나려는 대화의 하나였으리라.
그에게 마지막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만주의 벌거숭이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가 가진 아름다운 인성을 되찾고, 나보다 약한 사람을 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산을 오르며 내가 작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어린시절 집 앞에 있던 도봉산을 오르기 시작해 북한산을 등산하고 로키산맥을 거쳐 결국 히말라야 16좌를 오른 산악인 엄홍길. 그는 이제 청소년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엄홍길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늙어서 <유니세프 대사> 일을 하며 아름답게 살다가 삶을 마감한 배우 오드리 헵번처럼 말이다. 그의 얼굴이 갑자기 곱게 느껴졌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