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능력


내 친구들 중에는 카운슬러 역할을 하는 친구가 한 사람 있다. 모든 친구들이 개인적인 문제가 생기면 그를 찾는다.


부부 싸움을 하고 속이 잔뜩 상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그 친구다. 다른 사람들은 ‘부부 문제엔 끼어들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어서 친구 남편을 헐뜯는 건 사양하는 편이다. 곧 화해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게 될 텐데, 공연히 끼어들어 심한 말을 하면 나중에 입장이 난처해진다는 걸 서로 알고 있다. 그는 다르다. “뭐? 또 그런 짓을 했어? 정말 그 사람 안 되겠네. 어쩌면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니? 대체 그런 남자를 언제까지 데리고 살거니?” 정말이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콕콕 집어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를 내는 표정도 얼마나 생생한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부부 싸움의 당사자를 내가 아닌 그로 여길 가능성이 아주 높다.


직장 상사와의 갈등을 털어 놓아도 마찬가지다. 전업 주부인 그는 직장 문제는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그 점이 함께 상사를 욕하는 데 아무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도 역시 친구는 나보다 더 거품을 문다.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개구리들! 어디 가나 꼭 그런  인간들이 있어요. 그래봤자 개구리 아냐? 뭐가 그렇게 잘났대? 그렇게 잘났는데 왜 더 출세 못하고 그것밖에 못한대?”


‘엄마 친구 아들’이 우등생에 스포츠 만능, 성격까지 좋은 이상형 아들을 뜻한다면 그에게   ‘친구 남편’이란 반대로 게으르고 무심하고 이기적인 최악의 남자다. ‘직장 상사’도 마찬가지다. 직장생활 스트레스의 주범이며, 공은 자신이 차지하고 허물은 내게 뒤집어씌우는 사람이다.



그 친구는 철저하게 내 입장에서 생각해준다. 너도 잘한 건 없다느니, 그 사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느니, 그런 공허한 공정함 따위는 벗어던지고 시작한다. 무조건 내가 옳고 상대는 틀렸다. 나는 잘못한 게 전혀 없고, 나를 괴롭혔기 때문에 내 남편이나 상사는 천하의 악당이다. 나보다 더 분개하고, 나보다 훨씬 더 신랄하게 원색적으로 상대를 비난한다. 가끔은 “어, 뭐 그렇게까지 나쁜 짓을 한 건 아닌데......” 하고 내가 오히려 어물쩍 물러서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처음엔 그가 내 입장을 이해해주는 것이 기쁘고 고맙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그 친구가 가진 특별한 능력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분노를, 짜증을 자신의 것인 양 그대로 느끼는 것은 흔히 볼 수 없는 능력이다.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많은 문제들은 해결책이 없거나 해결책이 필요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장애인의 의료재활을 돕는 재단에서 활동하는 내게는 특히 그 친구의 공감 능력이 부럽다. 일에 매몰돼 출발점을 잊어버릴 때, 일과 사람의 우선순위가 뒤집힐 때 나는 그를 떠올리게 된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그 친구를 만나 얘기하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후련해진다. 비논리적으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위로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그의 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참동안 하소연을 늘어놓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나를 바래다주는 친구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다. “아, 이거? 근처에 임신한 도둑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먹을 걸 좀 갖다 두려고.” 멸치대가리며 아이가 먹다 남긴 생선 토막이었다. “깨끗하게 먹어치워. 아침에 다시 가보면 아무 것도 없어. 곧 새끼를 낳을 것 같은데 먹이 구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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