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업적


학창시절 어느 잡지에서 읽어본 충격적인 내용의 글이 있다. 서양의 어느 폭군이 어린 시절에 자신을 엄하게 가르친 스승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황제가 되자마자 그 스승을 데려다 잔인하게 죽였다는 이야기다. 그 스승은 혀와 팔다리가 모두 잘린 채 발가벗겨진 몸으로 황제가 여는 각종 연회장 앞에 수차례 세워져 온갖 모욕과 수치를 당한 다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진위를 떠나 이야기 속의 그 스승의 모습은 너무나 끔찍하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명언이 있다. 이것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기 1년 전인 1775년에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열린 어느 민중대회에서 패트릭 핸리가 한 말이다. 그는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면서 '쇠사슬과 노예의 대가로 얻어지는 생명이나 평화'를 거부하고 본국인 영국과 전쟁으로 맞설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자유를 죽음과 극단적으로 대비시키며 자유의 소중함을 크게 강조한 이 말은 시대의 명언이 되었다.


나는 한 때 죽음에 대하여 깊게 묵상해본 적이 있다. 그렇다고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당당히 맞서 싸울 줄도 알아야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도 아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나만이 아닌 모두에게 닥치는 운명 앞에 유독 두려울 것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죽음보다 깊은 어둠으로 몰고 가는가. 나는 그것을 자유에 대한 속박, 즉 육체적 정신적 '마비상태'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마흔 살이 되던 해인 1999년 초였다. 나는 잦은 피로감과 코가 막히고 목 안이 답답한 증세가 나타나 동네병원에 가서 몇 차례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증세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목소리마저 비음으로 나고 발음도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원래 감기 한번 호되게 걸려본 적이 없는 건강 체질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 후 대학병원 신경과에서 루게릭병(근위축성측삭경화증)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게 되었다.


루게릭병은 인구 10만 명당 대략 두세 명 발생하는 희귀난치병이다. 몸속의 운동신경세포가 점차 사라지면서 근력 약화와 근 위축을 초래하여, 언어장애·사지마비·급격한 체중 감소·폐렴 등의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에는 호흡장애 등으로 사망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게다가 발병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은 물론, 아직까지 변변한 치료제조차 없는 실정이다. 당시 국내에는 이 병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나도 병에 걸리고 나서야 이런 병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예후의 심각성과 기대여명이 수년 내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마치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사형장에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이 병에 걸린 환자는 개개인에 따라 질병 진행 속도에 차이가 있으나 결국 병이 진행되면서 말기에는 대부분 두 눈만 깜박거릴 수 있을 뿐 언어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전신마비가 되어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그야말로 '육체의 감옥'에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그러나 환자의 지적기능 등의 의식과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 등의 감각은 끝까지 명료하게 남아 있다. 결국 의식은 멀쩡하나 위루술과 기관절개술, 인공호흡기 등 각종 의료기기를 부착하고 24시간 주변의 간병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식물인간'과는 정반대의 상태가 되어 뚜렷한 의식과 두 눈으로 자신의 죽음을 끝까지 생생하게 지켜보게 된다.


루게릭병 발병 후 건장했던 나의 몸은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듯 하루가 다르게 살이 빠지면서 점점 마비되어 갔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결국 천직으로 여기고 20년 가까이 지키던 교단도 떠나야 했다. 마지막 수업의 애절했던 순간은 지금도 나의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마지막 수업은 2학년 '영어회화' 시간이었다. 마지막 수업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물론 동료교사들도 내가 루게릭병에 걸려서 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거의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은 평소처럼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종료시간 몇 분을 남겨두고 결국 나는 칠판에 'Time to say goodbye'(작별인사시간)라고 썼다. 그리고는 같은 제목의 외국노래를 테이프로 들려주면서 한 명 한 명 학생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교실 구석구석도 살펴보다가 운동장쪽 창문을 뚫고 들어온 겨울햇살 속으로 시선을 파묻었다. 수업을 끝내고 1층 교무실로 내려오는데 질병의 진행으로 가뜩이나 힘이 빠진 두 다리가 그날따라 더욱 후들거렸고, 나는 한참이나 계단난간을 잡고 그대로 서있어야 했다.


정들었던 학교를 떠나 교문을 등져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대로 나의 가족들에게 전이되었다. 한참을 일할 나이에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 불치병에 걸려 갑작스럽게 실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그러나 나와 우리 가족들에게 닥친 그 고통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나의 병이 깊어갈수록 아내와 아이들이 짊어져야할 고통의 무게도 그와 정비례하여 배가되었기 때문이다.

루게릭병의 특성 중에서 환자에게 주는 가장 큰 고통 중 하나는 바로 진행성 질환이라는 데에 있다. 매일 매일 몸에서 근육세포가 끊임없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어제보다 오늘의 몸 상태가 더 좋지 못하며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빠진다는 사실은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정신적 중압감과 불안을 가져다준다.


사람이 큰 고통 한가운데에 장기간 노출되어 있을 경우 억누를 수 없는 증오와 분노, 그리고 세상의 질서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환멸과 회의로 깊은 절망의 늪 속에 빠져들게 된다. 나 또한 이에 예외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없는 비관과 자포자기 상태로 마냥 죽음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마음을 다잡고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꿈꾸고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루게릭병 발병 뒤에도 뒤늦게 시작한 학업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직장 근처에 있는 한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 중이었다.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인데 그 몸으로 무슨 공부냐?"며 가족들도 말리고 지도교수님도 만류했지만, 발병 이듬해인 2000년 8월에는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곧바로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병세의 악화로 다급해진 나는 입학하자마자 지도교수님과 상담하여 박사학위 논문에 대한 주제를 정한 뒤 대략 2001년 여름부터 3년 정도 논문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책도 마음대로 펼쳐 읽고 컴퓨터 자판도 두 손으로 자유롭게 칠 수 있었다. 그러나 2003년 말부터는 두 팔을 거의 쓸 수 없게 되어 참고서적 등 자료들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두 발로 책장을 넘기며 허리를 바짝 구부리고 읽든지, 아니면 아내가 옆에 앉아 책을 펼쳐들고 책장을 넘겨주어야 했다. 논문 작성 마무리는 컴퓨터 모니터에 화상 키보드를 설치하여 처음에는 오른쪽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작성했으나 그것도 2004년 초부터는 집게손가락의 기능이 많이 약해져 주로 오른쪽 가운뎃손가락 한 개만을 사용하여야 했다.



마침내 투병 6년차인 2004년 8월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내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학위 증서를 받는 나의 모습이 그날 오후 주요 TV의 저녁 뉴스에 방영되었고 이튿날 아침에는 거의 모든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몇몇 TV 방송 프로그램과 잡지 등에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는데, 우리 부부는 이를 위한 녹화와 인터뷰 등에 최선을 다해 임했다. 왜냐하면 이번 일을 계기로 내가 앓고 있는 루게릭병을 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려서 사회적, 국가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루게릭병을 포함한 각종 희귀난치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여러 환우들에게 희망을 주고 투병 여건을 개선하는 데 조그마한 밑거름이라도 되고 싶었다.


투병 7년차인 2005년 말에는 나의 투병기를 책으로 펴냈다. 내가 박사논문을 침몰하는 배의 갑판 위에서 썼다면 이 책은 이미 침몰해버린 배를 떠나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쓴 필사적인 것이었다. 나는 1년 넘게 거의 매일 여덟 시간 정도를 책을 쓰는 데 매달렸다. 아내가 아침에 직장에 출근하기 전에 나를 컴퓨터 앞에 앉혀놓으면 나는 아내의 퇴근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글을 썼다. 온몸이 거의 마비된 나는 혼자 힘으로는 의자에서 스스로 일어설 수도 없기 때문에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마우스 위에 힘없이 올려진 오른쪽 가운뎃손가락 한 개를 사용해 글을 쓰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 그러다가 지치면 고개를 앞쪽으로 바짝 떨어뜨린 채 낮잠을 잤다.    손가락 한 개로 마우스를 조작하여 화상 키보드를 하나씩 찍어서 글을 작성하려니 비장애인들이 10분이면 쓸 분량을 나는 2-3시간 걸려야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글쓰기 과정이 그저 지루하고 소모적이며 성가신 작업만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정작 몸이 건강하고 자유로울 때는 엄두도 내지 못한 희망의 메시지 전달을 오히려 '육체의 감옥'에 갇히고 나서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삶에 임하는 자세일 것이다.


어느 잡지에 실린 최근에 찍은 내 사진을 바라본다. 사진 속의 나는 의자에 앉아 다소 여유 있는 모습으로 양팔을 팔걸이에 올려놓은 채 고개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나의 등 뒤에는 책들이 제법 빽빽하게 꽂혀 있는 책장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컴퓨터 모니터와 자판이 보인다. 아무리 주의 깊게 사진을 들여다보아도 인류 최악의 질병 중 하나라는 루게릭병에 걸린 환자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어떤가. 나는 혼자 힘으로는 의자에 앉거나 일어설 수 없다. 팔걸이에 올려놓은 양팔은 거의 움직일 수 없으며 조금만 팔걸이에서 팔이 벗어나도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져 대롱거린다. 안면근육도 많이 빠져나가 아랫입술과 턱 주변이 일그러졌고 웃음과 울음을 마음대로 조절하거나 멈출 수 없다. 머리가 목받침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목 근육의 약화로 머리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가 앞쪽이나 뒤쪽으로 꺾이며 스스로 고개를 들 수 없다. 나의 등 뒤에는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지만 나 혼자 힘으로는 단 한 권의 책도 가져다 펼쳐볼 수도 없고 책장을 넘길 수도 없다. 컴퓨터 자판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칠 수 없게 되었다.


극심한 언어장애로 목소리도 잃은 지 오래되었고 음식물도 대부분 믹서기에 곱게 갈아서 먹어야 그나마 좁아진 식도를 통과할 수 있다. 이제 나는 몸이 뒤틀어지고 허리의 힘도 많이 빠져서 의자에도 오래 앉아 있기 힘들게 되었고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두 다리 쭉 펴고 잠자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반듯하게 누워 있으면 연하장애로 입 안 가득 고여 있는 침이 기도로 흘러 들어가 숨이 막혀버리거나 사례에 걸리기 때문이다. 또한 튀어나온 등뼈는 침대바닥에 닿아 박히고 강직현상이 심한 두 다리는 잘 펴지지도 않을 뿐더러 펴더라도 금방 다시 오그라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호흡 근육의 약화로 폐가 횡격막을 밀어내는 힘이 약해져서 가슴이 곧 답답해지며 호흡곤란이 오기 때문에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등을 바짝 구부리고 있어야 잠에 들 수 있다.


나와 같은 병인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영국의 세계적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일찍이 "내 생애 최고의 업적은 바로 다름 아닌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두 눈을 깜박거릴 수 있는 것을 제외하면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손가락 두 개만의 미세한 제한된 움직임뿐인 전신마비의 상태에서 그가 겪어오고 있는 기약 없이 길고 긴 투병생활이 얼마나 험난하고 괴로운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 하겠다.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져버린 나의 육체. 온몸이 마비의 고통 속에 함몰돼버린 내가 다시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병을 이겨내려는 의지와 치유의 희망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끝까지 마음만은 허물어지지 않고 얼굴에 미소를 띠며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면 그것도 하나의 커다란 축복이 될 것이다. 그저 주어진 환경에 적극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수동적인 삶이 어쩌면 나 같은 환자에게는 최선의 삶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한된 물리적 상황에서도 나름으로 보람을 느끼며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많은 분들이 힘든 삶의 여정을 훌륭하게 이겨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는 것이고, 희망이 있는 한 그 희망을 향해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다. 존재 자체가 희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원망과 자포자기로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남아 있는 나의 삶이 그리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원규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20년간 서울 동성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했으며, 1999년 루게릭병 발병 전까지 3학년 담임을 9년이나 맡을 정도로 열정이 강한 선생이었다. 향학열 또한 남달랐던 그는 루게릭병 발병 직후에 성균관대 박사과정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고, 온몸이 굳어가는 상황에서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 하나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논문을 완성해 200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박재삼 시인의 추천으로 문예지에 '매미', '강물이 어두워져' 등의 시를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했으며, 현재 '한국루게릭병연구소'(www.alsfree.org)와 인터넷 까페 '루게릭병 네트워크' (http://cafe.daum.net/alsfree)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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