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나고 째부러진 사람들과 살고 싶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에세이 ‘사람과 사람’ 펴낸 송경용 성공회 신부
에세이 ‘사람과 사람’ 펴낸 송경용 성공회 신부
“이긴 자나 진 자나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한다. 지금 우리들이 누리는 이 시대는 길고 긴 역사의 산물이다. 지금 이 순간은 그 긴 역사에 비하면 아주 짧은 순간이다. 패배한 사람들도 좌절할 이유가 없다. 길은 곧은 길도 있고 돌아가는 길도 있다. 조금 돌아가야 한다면 신발 끈 다시 고쳐 매고, 지고 가야 할 짐 꾸러미 다시 단단히 붙들어 매면 된다. 문제는 그런 정신이 살아있느냐 없느냐다. 본인들의 승리를 위해서였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고 진정으로 역사 앞에 정직했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현장 누빈 ‘발바닥 사제’ 국제적 나눔·평화위해 영국행
철거민·빈민·좌익 장기수 등 27년 함께한 ‘사람이야기’ 펴내
“사람들 숲에서 희망 찾을 것”
2003년 9월 영국에 가서 국제선교기관에서 일한 뒤 지금 런던에서 성공회 한인교회 주임사제 겸 런던대학 한인학생들 채플을 맡고 있는 송경용(48) 신부. “건강이 너무 나빠져 쉬고 싶었고 20년이 넘는 산동네 생활과 나눔의 집, 사회활동을 뒤돌아보기 위해”, 그리고 “세계를 배우고”, “국제적인 나눔과 평화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영국에 갔다. “빨리 한국에 돌아가 지금까지 해온 대로 살고 싶다. 지금도 이름도 빛도 없이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벗들이 있다.” 전자우편으로 쏟아부은 질문에 그는 그렇게 답했다.
시인 박노해는 노래했다. “모든 진실은 현장에 있다./ 모든 사랑은 현장에 있다./ 나는 발바닥의 사랑만을 믿는다./ 가난한 삶의 현장을 발바닥으로 누비는/ 송경용 신부의 발바닥 사랑, 발바닥 영성./ 그는 우리 시대 ‘발바닥의 사제’이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지금과 같은 연말연시에, 특히 성탄절에 추운 바람 쌩쌩 부는 철거민 촌의 벌판에서 드럼통에 불을 피우고 성탄미사를 드리던 때다. 그리고 노숙인들과 작은 방에서 예배를 마치고 국밥을 나누어 먹던 때다. 저 아랫마을에서는 온갖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화려하게 치장을 해놓고 유혹을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이 흐르고 함께 한 마음으로 소망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던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1979년 9월 연세대 건축학과 학생 송경용에게 선배 두 사람이 만나자고 했다. “우리 야학 함께 해보지 않을래?” 그의 인생행로가 그걸로 바뀌었다. 갑작스레 집안이 몰락한 뒤 친척들 집에 얹혀 살기도 했고 시장에서 장사도 해봤다. 대학 등록금 벌려고 서울 강남 룸쌀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조리한 세상을 한탄했다. 공사장 잡부를 하면서도 농촌봉사활동, 수련회를 쫓아다녔다. 대학의 낭만은 배부른 남의 나라 얘기였다. 그러다가 찾아간 서울 상계동 적십자회관 야학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계시와도 같은 체험을 했다. 지난 달 나온 그의 책 <사람과 사람>(생각의나무)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그 냄새와 눈길들과 사람들의 모습에서 바로 ‘아, 내가 있을 곳이 여기구나’하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얼마나 편안했는지 그날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내게는 참으로 길었던 스물한 해의 무거웠던 짐꾸러미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 후 27년 동안 지금까지 내 삶의 못자리가 되었던 상계동 야학에 가는 길은 그렇게 단순했고 쉬웠다.”
그 27년 동안 그는 개발독재시대에 변방으로 밀려난, 모질게 상처받고 지지리도 가난했던 노동판 아이들과 함께 살았고, ‘거사’를 꾀했으나 실패했으며, 결국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고 성공회 사제가 됐다. 상계동 봉천동 달동네에 ‘만남의 집’을 세우고 ‘청소년 쉼터’ ‘노숙가정 쉼터’를 만들었으며 철거민들과 함께 싸웠다. “왜 그런 빨갱이 노인네들을 보호하느냐”는 힐난을 들어가며 출옥 뒤 갈 곳 없는 30년 이상 복역 좌익 장기수들과 더불어 10여년을 살았다. ‘공산주의자’였던 그들이 “나눔의 집 같은 교회라면 북에도 동네마다 생기면 좋겠다”고 했고 불탄 교회를 다시 세우는 데 앞장섰으며, 놀랍게도 십자가상을 정성스레 깎아 바치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은 그 세월 그 사람들 얘기를 담았다. “구체적인 사람의 이야기에 주목하지 않는 어떤 이론도, 사상도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공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에 새겨진 문자의 미로를 헤매기보다는 사람의 숲에서 살고 싶었다. 그 사람들 안에 계신 하느님, 못나고 찌부러졌다고 무시당하던 사람들의 마음에 함께 하시는 거대한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문학수업을 따로 했나 싶어 물었더니 그런 적 없단다. 역시 글의 힘은 삶의 진정성에서 나오나 보다.
사회복지, 사회안전망을 “기본적인 인권이자 시민적 권리로 인식”하고, 그것이 정권의 운명을 가르는 영국에 비하면 우리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보수든 진보든 “둘 다 너무나 정치 우선이고, 정치공학적 구도 일변도”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다른 길이 있다!’고 외쳐야 할 사람들이 그 다른 길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능력도 신뢰도 상실해버렸다.”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할 종교마저 그러하니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그는 탄식했다. “지금은 진실로 다시 낮은 곳으로 향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혁명이라는 영어단어 Revolution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다시 낮은 곳에 서서, 사람들의 숲으로 들어가서 함께 땀흘리고 고난을 나누면서 물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가치의 연대를, 그 기반을 만들어야 할 때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한 번 긴 호흡으로, 역사의 기반을 만든다는 각오로 낮아지고 흩어져서 사람들의 숲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사람들의 숲에 행복이 있고 희망이 있고 길이 있다.”
그리고 소망한다. 우리 모두 단 한 순간만이라도 멈춰 서서 자신이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기를. “서점이나 우리들 책장에 주식, 펀드, 경매, 성공하는 법, 성공하는 인맥쌓기 등에 관한 책보다는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고찰하게 하는 책들이 많아지기를 고대한다. 우리들이 지금 가진 것을, 지식과 지혜와 물질, 마음과 기도를 나눌 수만 있다면 그런 책들이 주는 정보와 기술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운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지금은 애통하고 가난해도 정의와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사람에게 큰 위로와 복이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약속이자 축복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