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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는 장애가 없다

백경학 상임이사의 미국 연수기 2편 <어빌러티 나우>

 

'어빌러티 나우' 외관과 잔디밭 풍경
<어빌러티 나우> 시설 외관(위)과 건물 앞 잔디밭 풍경

좀 일찍 서두르긴 했어도 약속시간 보다 많이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구글 지도에서는 버클리대학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자동차는 생각보다 빨리 불과 20분 만에 우리를 산 중턱에 내려놓았다. 산중에 수도원도 아니고 중증장애인 시설이 있으리라고는 누가 상상했을까. 주차장에 들어서자 시야가 확 트였다.

이른 시간인데도 전동휠체어가 오르내릴 수 있게 개조된 30여대의 미니버스에서 장애인들이 줄줄이 내린다. 야단법석이란 말이 이런 때 쓰이는 것 같다. 산중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걷기 힘든 노약자와 임산부는 물론 전동휠체어를 7대나 실을 수 있는 패러트랜지트(Paratransit) 버스다. 중증장애인들이 야구장과 볼링장에 가고 쇼핑을 하는데도 이 버스가 이용된다고 한다.

오클랜드를 대표하는 중증장애인 교육시설인 <어빌러티 나우(Ability now Bay Area)>는 나지막히 지어진 군대 막사처럼 보였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프로그램실과 강당, 식당 등이 끝없이 펼쳐졌다.

레슬리 베로쉬 사무총장
레슬리 베로쉬 사무총장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건물 앞으로 펼쳐진 잔디밭. 이런 고바위 언덕 위에 건물이나 제대로 지을까 생각했는데 ‘웬걸’ 족히 2000평은 넘어 보이는 초록색 평원이 펼쳐져 있다. 샌프란시스코 만(Bay)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다. 비버리힐스 같은 고급주택이 들어설 자리에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리둥절한 내 표정을 읽었는지 레슬리 베로쉬(Leslie Werosh) 사무총장이 설명한다.

원래 앞마당은 나무와 잡초들이 뒤엉켜 자라서 쓸모없는 땅이었는데 인근 고등학교에서 먼저 평탄화 작업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 학교 축구팀과 라크로스(lacrosse·그물이 있는 스틱을 사용하는 스포츠)팀이 연습할 공간이 없어서 <어빌러티 나우>에 10만 달러(약 1억2000만원)을 기부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이 돈으로 잔디밭은 조성한 뒤 학교 스포츠팀이 필요로 할 때마다 빌려주고 평소에는 장애인들이 산책을 하거나 행사 때 사용하고 있다.” 이웃인 학교에서 시작된 기부가 장애인들이 편히 생활할 수 있는 변화를 불어왔다니 아이디어가 산뜻하다.

개근자 명단이 연도별로 붙어있다.
개근자 명단이 연도별로 붙어있다.

복도 벽면에는 연도별로 이름이 새겨진 알루미늄 명패들이 빼곡히 붙어있다. “이 시설에 기부한 사람들이냐”고 묻자 “개근자 명단”이란다. 산중에 도 닦는 스님도 아니고 1년을 하루 같이 빠지지 않고 개근한 장애인이 이렇게 많다니 놀랍다. 무슨 매력이 하루도 빠지지 않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시설에서 인기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실에 들어섰다. 모두가 컴퓨터 화면에 빠져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몸을 가누기도 힘든 사람들이 무언가 열심이다. 몸이 휠체어에서 떨어지지 않게 벨트로 고정한 사람들도 있다.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움직여 낱말맞추기를 하는가 하면 뮤직비디오를 틀어놓고 몸을 흔드는 사람도 있다.

휠체어에서 손가락을 치켜든 장애인
휠체어에서 손가락을 치켜든 장애인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자 겸연쩍은지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카드놀이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신나게 게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컴퓨터가 모두 최신형 애플 제품이다. 선반에는 중증장애인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화면 확대기와 특수 키보드, 특수 마우스 등이 놓여있다. 우리 같으면 지역에 있는 보조기기센터를 찾아가 어렵게 주문해야 빌릴 수 있는 제품들이다.

산호세(새너세이)에 본사를 둔 구글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제품이 정식 출시되기 전에 미리 사용해 실제 불편한 점이 없는지 알아보는 베타 테스트를 이곳을 통해 하고 있다고 한다. 제품을 개발할 때 장애인들에게 편리한 제품은 모두에게 편리하다는 생각일 것이다. 구글과 <어빌러티 나우>의 좋은 인연이 계속 이어진다면 장애인의 삶도 훨씬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의 포스가 느껴지는 한 여성을 만났다. 컴퓨터 앞에 앉아 포토샵 작업에 열심이다. 손가락마다 반지를 끼고 목걸이와 귀걸이, 팔찌를 주렁 주렁 했을 뿐 아니라 코에도 피어싱을 했다. 번쩍이는 금속과 검은색 가죽 잠바가 왠지 잘 어울린다.

<어빌러티 나우>가 자랑하는 디자이너 모니크 해리스(Monique Harris·54)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뇌성마비 장애인인 그녀는 머리에 쓴 마우스를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시도 쓴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갤러리에서는 그녀의 작품을 구입해 전시할 정도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한 직원이 보여준 올해 테이블 달력은 그녀의 작품들로 만들어졌다.

모니크 해리스
모니크 해리스

이마에 청진기처럼 커다란 커서를 매단 채 포토샵 작업을 하는 그녀에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행복하다”고 “일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서 행복하다.”고 대답한다.

그녀 주변에는 여러 사람이 일하고 있다. 컴퓨터 화면만큼 커다란 키보드를 사용하고 있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일하고 있는 모니터를 들여다봤더니 병원 슬로건을 만들고 있다. ‘어린이병원은 가정과 같습니다. 잘 훈련되고 자격을 갖춘 간호사들이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카피가 쓰여 있다. 이들은 주로 독자적으로 작업을 한다. 스스로 잘하거나 하고 싶은 사업이 있으면 <어빌러티 나우>에서 나서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전문 지식과 기능을 갖춘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주문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디자인과 카피를 만들고 있는 것이 낯설지만 아마 다른 장애인들이 꿈꾸는 모델일 것이다. 전문기술을 가진 장애인을 양성하고 지원하는 것이 <어빌러티 나우>의 역할일 것 같다.

특수 키보드로 일하는 모습
특수 키보드로 일하는 모습

일하다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건물 한쪽에 마련된 치료실에서 전문가로부터 요가와 마사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넓은 방 한쪽에는 매트리스와 물리치료 도구가 쌓여있다. 최근에는 관련법이 강화되면서 직원뿐 아니라 자원봉사를 하려는 사람들도 일반 범죄는 물론 성범죄 조회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어빌러티 나우>는 샌프란시스코 동부지역의 뇌성마비센터로 출발했다. 뇌성마비 어린이들을 가진 부모들에 의해 1939년 결성된 뒤 매리 배일(Mary Valle)이라는 한 여성 독지가의 도움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보험업으로 크게 성공한 배일은 1956년 정신병원이었던 지금의 부지를 매입한 뒤 <어빌러티 나우>를 지어 기부했다. 이를 계기로 <어빌러티 나우>는 뇌성마비뿐 아니라 자폐, 뇌 손상, 척수 장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장애인을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마린 데코스트 국장
마린 데코스트 국장

<어빌러티 나우>의 연간 예산은 얼마나 될까. 지난해 예산이 약 500만달러, 우리 돈으로 약 60억원이다. 매리 배일 여사가 세운 재단에서는 매년 68만달러(약 5억4000만원)를 지원한다. 전 예산의 5% 정도는 지역사회부터 기부받고 있다. 재무담당 마린 데코스트(Maureen DeCoste) 국장은 “20년 동안 정부지원금이 같아도 지금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이제는 새롭게 협의할 시기가 됐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경우를 물어서 “지방정부가 장애인시설의 운영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사업비가 늘 부족하기 때문에 일반 시민의 기부는 물론 기업과 모금연합체로부터 지원받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설명하자 ‘같은 처지’라는 반응이다.

직원 38명이 장애인 85명을 교육시키고 직업을 찾아주는 기관의 연간 예산이 60억원이라니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예산의 적고 많음으로 장애인 프로그램의 질을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이곳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이 느끼는 만족감과 일하는 직원들의 자부심은 우리와 다소 다른 것 같다. 한국이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장애인 복지 예산은 많이 따라 잡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아직 좁혀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빌러티 나우> 홈페이지에 나오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우리는 기부금의 90% 가까이를 장애인의 프로그램을 위해 사용합니다. 이중 관리운영비 9%, 기금개발비 3%, 프로그램 진행비 88%를 차지합니다.”

<어빌러티 나우(Ability Now>

주소: 4500 Lincoln Ave Oakland, CA 94602
전화: (1)-510-531-3323
이메일: info@abilitynowba.org
홈페이지: www.abilitynowbayarea.org

미국의 장애인 의료제도

어빌리티 나우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이 마사지를 받고 있다.
어빌리티 나우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이 마사지를 받고 있다.

어빌리티 나우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이 마사지를 받고 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루즈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뉴딜정책에는 복지 개혁도 들어 있었다. 루즈벨트는 1935년 장애인을 사회적 약자로 규정해 권리를 보호하는 사회보장법에 서명했다.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초석이 된 이 법의 주 내용은 주정부가 관장하고 연방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내용의 사회복지서비스와 실업보험, 공공부조다. 이어 1965년 존슨 대통령이 65세 이하 저소득층에게 연방과 주정부가 의료비를 나누어 부담하는 메디케이드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비롯해 20년 이상 사회보장세를 낸 65세 이상 노인의 의료비를 연방정부가 부담하는 메디케어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사회복지법을 만들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의료 혜택을 못 받는 미국 국민 3200만명이 정부와 기업의 지원으로 2014년까지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하도록 하는 개혁법안, 일명 오바마케어를 채택했다.

□ 메디케이드(Medicaid):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65세 이하의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다. 주정부가 운영을 맡고 연방정부가 재정을 보조한다. 소득이 중요한 지표가 되며 미국 시민권자와 등록된 외국인 등 일정한 자격요건을 요구한다.

□ 메디케어: 연방정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65세 이상의 노인, 장애나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 프로그램이다. 이 역시 시민권자와 합법적으로 미국에 체류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글·사진= 백경학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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