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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을 받다

김종옥 8월 칼럼

 

살면서 크게 위안을 받았던 순간이 있다. 크게 위안이 되는 글귀를 만날 때도 있었다. 그 때는 그게 그렇게 큰 위안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두고두고 깊은 위안이 되는 것들이 있다.

아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를 ‘치료’해 보겠다면서 한 놈은 걸리고 한 놈은 업고 돌아다닐 때 일이다. 그 날도 그렇게 정신없이 허둥지둥 마을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이 한산했다.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옆 좌석 웬 할머니가 나와 아이들을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따라 미소로 건성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할머니 표정이 뭔가 하실 말씀이 있었다.

할머니의 손

– 너무 애써서 살지 말아요.
– 네?
– 너무 애써서 깔끔하게 살려고 하지 말라구요.
–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 살아보니 너무 그렇게 동동거리고 살 게 아니었어요. 청소도 빨래도 요리도 적당히 하면서 지낼 걸 너무 애쓰고 산 것 같아서.

그 말씀은 그 순간에도 위안이 되었고, 새록새록 위안이 되었고, 두고두고 위안이 되었고, 평생 깊은 위안이 되었다.

너무 애쓰고 살지 않아도

당시 내 이웃에 무척 깔끔한 살림꾼이 둘이나 살고 있었는데, 나는 그이들의 살림 솜씨에 주눅이 잔뜩 들었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니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키우던 터라 저마다 여간 부산한 게 아니었을 텐데도 그이들의 집은 아침저녁으로 물걸레 마른걸레로 두 번씩 닦아 반질반질했고, 간식도 손수 만들었고 흰 빨래는 매번 삶았다. 게다가 시간 내어 뭔가 자격증 강좌도 다니고, 스스로 주부들 대상으로 수공예 강좌 같은 것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주식도(!) 좀 했다. 그들 눈에 우리 집은 두서없이 먼지소굴이었을 게다. 그래도 남들 흉내는 내보겠다면서 앞치마 두르고 나름 살림이란 걸 했지만 늘 열등감 같은 걸 깔고 살았다.

그랬는데 살림을 해도 나보다 몇 배는 더 잘했을 것 같은 인생선배 할머니가 문득 나에게 건네주시는, 삶이 응축된 웅숭깊은 지혜의 말씀이 다름 아닌, 너무 애써서 살림하지 말아라, 라니! 그 때 내게 가장 필요했던 말이 아마도 그것이었으리라. 쓸고 닦고 해먹이는 데 너무 힘을 쏟지 말아라, 그 일들 하느라 네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미뤄놓지 말아라, 너무 깔끔하게 사는 것이 너의 가장 큰 소임인 것처럼 살지 말아라…….

달릴 준비를 하는 사람

사람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천수관음이 할머니로 현신하여 그 마을버스에 앉아있었던 걸까. 그래서 나를 한번만 척 봤는데도, 소질 없는 살림살이에 아등바등 하는 내가 훤히 보였던 걸까. 내가 살림의 무게에 눌려서 비명을 지르고 있던 게 들렸을까. 아무튼 할머니의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게으르거나 소질 없어서 못하는 그 ‘살림꾼’의 멍에를 단박에 벗어던졌다. 그것은 “뭣이 중헌디~!”라고 하는, 선배의 사자후, 선지식의 일갈 같았다. 나는 그때 비로소 용감하게 ‘비살림꾼’의 열등감을 집어던지고 ‘반살림꾼’이 되었다. 열등감, 미안함이 없어졌으니 홀가분하고 좋았다. 반들반들하게 살림 꾸리는 게, 결국엔 돌아보니 그리 애쓸 필요가 없던 헛것이라잖아, 나는 누구에게 말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자신에게 말하고 또 말하며 기분이 좋았다.

잘 못 고치는 잘못

입술은 메마르고 표정은 거칠고 말투는 날카롭고 손길은 냉랭했으리라. 눈빛은 흔들리고 발걸음은 지쳤고 가방은 의미 없이 흔들거렸으리라. 그 때의 내 모습 말이다. 할머니의 말씀은 나의 거친 삶의 시간을 다독이고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이후로도 어떤 강퍅한 순간이 올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린다. 너무 애써서 하지 말아라-.

우리는 너무 애써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열을 내고 힘을 쏟다가 지레 지친다. 정작 내가 돌파해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닌데, 나는 사소한 것들에 목숨 걸고 핏대 올리고 덤벼들어 힘을 쏟다가 너덜너덜해진 채로 허망한 것을 손에 들고 나온다. 사랑하는 이와 부드러운 바람을 맞으며 소풍 갈 시간에 그의 마음을 떠보고 나의 무게를 견주어 보려고 싸움을 벌이며 시간을 보낸다. 가족과 시끌벅적 놀아야 할 시간에 청소하고 빨래하고 잔소리하고 말씨름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어디에선가 엉뚱한 일에 이미 파김치가 되어 정작 내가 할 일에는 만사가 귀찮다. 잘 못 고치는 잘못.

싸이가 해 준 말

텔레비전에 싸이가 나온다고 하면 열심히 챙겨 본다. 접신한 듯한 그의 공연을 보는 맛도 좋지만, 무엇보다 싸이는 가끔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한다. 그가 어느 프로그램에 나와서 한 말이다. 엠씨가 싸이 보고 왜 그렇게 다 쏟아 붓는 것처럼 공연하는지 물었다. 싸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예전에 4년 동안 활동을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생각을 했다. 지난 공연이 마지막인 줄 알았더라면 그 때 더 열심히 했었을 걸. 이 후회를 4년 내내 했다.

이 말을 하며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에서 땀과 눈물과 미소가 함께 반짝였다. 나는 이후로 싸이가 나와서 공연할 때마다 그 말이 떠오른다. 아, 저 사람은 지금 거기에 다 쏟아붓고 있구나. 나는 지금 누군가가 마지막인 듯 다 쏟아붓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거로구나, 하며 감격한다. 정말 좋은 것, 정말 내게 의미 있는 것에 아낌없이 쏟아붓는 삶은 얼마나 좋으랴.

무대 위 마이크
그런데 정작 나는 이제는 쏟아붓고 싶어도 쏟아부을 만한 에너지가 그리 많지 않다고 느낀다. 늙어 그렇다. 뭘 조금 하려 해도 자꾸 게을러지고 지친다. 에너지가 백만스물 하나가 아니라, 핑계만 백만서른 개가 넘는다. 그러니 아끼고 아껴서 잘 써야 한다. 지금 이 무대가 마지막이라면 나는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아끼고 아낀 에너지는 어디에 써야 할까. 지금 이 순간이 내가 이 세상에 보이는 마지막 모습이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지금 이 순간이 내가 내 사랑하던 사람에게 보이는 마지막 모습이 된다면,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고 있어야 하는가.

내 아이의 거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어떤 이가 숲 속 작은 오두막에서 혼자 며칠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있었다. 단출한 음식을 손수 해먹고, 음악을 듣고, 책 몇 권을 읽고, 풀벌레 소리를 듣고, 안개가 낀 들판을 서성이고, 비오는 숲길을 장화를 신고 걷고, 별이 보이는 밤하늘을 올려 보다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잠을 잤다. 내가 마치 그 속에 있는 듯 보고 즐기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거처가 있다. 그렇다면 내 아들이 좋아하는 거처는 어떤 곳일까.

내 아들이 좋아할 만한 거처는 그곳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는 그저 자고 먹고 입고 할 것이 일정한 작은 공간에서 좋은 모니터와 스피커가 세팅된 고성능 컴퓨터만 있으면 자족할 것 같다. 자기가 즐겁지 않은 것을 같이 즐거워하자고 잡아끄는 사람도 없고, 자기가 모르는 것을 불쑥 물어오는 이도 없고, 자기를 낯설게 쳐다보는 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자족하며 살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다일까?

반갑게 인사하는 이웃

내 욕심은 이렇다. 5분 거리에 이웃이 산다. 서로 번거로운 거 싫어하는 소박한 이웃이 살아서 그저 저녁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안부를 묻고, 대문에 우유가 하나씩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인사를 건네는 거다. 동네 작은 광장에서 작은 장이 서면 슬쩍 나와서 구경을 하며 별로 크게 쓸모없을 것 같은 사소한 물건을 만지작거리다 무언가를 사갖고 가는 것을 보고 미소 짓고, 가끔 소극장에 신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러 와서 몇 번씩 반복해서 보는 뒷모습도 보아주고, 기침을 심하게 한다 싶으면 동네 의사에게 슬쩍 말해주는 그런 이웃이 있는 거다. 아이도 제 보기에 쓸모없을 것 같은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다른 사람을 보고 궁금해 하고, 영화관에서 자기처럼 커다란 팝콘 상자를 끌어안고 종일 앉아있는 사람을 보며 살아가겠지. 다리를 다친 도마뱀을 들고서 병원에 갖다 놓을 수도 있을 게다.

엄마는 여전히 살림을 깔끔하게 못 하는 주제에 아들의 집에 들를 때마다 잔소리를 해댈 것이고, 아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몸에 좋은 음식과 아들이 좋아하는 고열량의 느끼한 음식을 함께 해올 것이다. 그리고는 아들의 일정표를 확인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다니기에 적당한지 물을 것이고, 연금과 수당과 급여가 적혀 있는 통장을 확인하라 이르며 아들의 금융자산이 얼마나 되는지 슬쩍 엿볼 것이다. 엄마는 아들이 그다지 반기지는 않지만 가끔 여행을 같이 가자 조를 것이고, 그럴 때면 그 집은 한참씩 비워진 채로 아들이 틀어두고 간 게임을 컴퓨터 혼자서 열심히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하고 싶다. 이것 말고 다른 모든 일은 내가 지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으로 남기기에 아쉽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헐렁하게 보내야 할 것들이다. 내가 내 아이에게 그의 귀한 삶에 어울릴만한 귀한 거처를 만들고 있다면, 그 모습은 내게 흡족할 것이다. (남들만큼 살림도 못하니 자식에게 이런 것에라도 애쓰는 어미로 보여야 하지 않는가 이 말이다. 녀석이 알아줄지 모르겠지만.)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살면서 크게 힘이 되어주는 또 다른 말을 이것이다.
“결국엔 모두 좋아질 것이다. 지금 좋지 않다면 아직 끝이 아닌 것이다.”

지금은 아직 끝이 아니라서, 결국 끝에는 다 좋아질 삶을 살고 있으니, 지금 나의 삶은 얼마나 좋으냐.

(**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 칼럼을 여기서 마치려 합니다. 부족한 글을 실어주신 분들께도, 읽어주신 분들께도, 읽지 않으신 분들께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내내 조화로운 삶을 보내시길.)

*글= 김종옥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서울지부 부대표)

자폐성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둔 김종옥은, 가끔 철학 인문학 관련 책을 쓰지만, 가장 쓰고 싶어 하는 SF소설은 아직 쓰지 못했다. 가끔 인문학 강의도 하고 지역 내 마을사람들 일에 두루 참견하며 바쁜 척하고 지내고 있다. 쓰임과 즐김이 있는 좌파적 삶을 살고 싶어 하며, 매일같이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한다. 지은 책으로 <철학의 시작> <처음 만나는 공자> <공자 지하철을 타다(공저)> <장자 사기를 당하다> <지구는 생명체가 살만한 곳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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