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고 선한 사람들

장춘순 이사의 일본연수기 2탄


 


6차 산업은 최근 우리나라 농업계의 빅 이슈다. 조금 생뚱맞은 공식이지만 1차 산업인 농업 생산과 2차 산업인 가공 및 판매, 그리고 3차 산업인 서비스업까지 포함한 복합적 농업을 두고 1,2,3차를 모두 더해 6차 산업이라고 부른단다.


세 번째 방문-모쿠모쿠 농장


모쿠모쿠 농장이 그 대표 모델이다. 처음에 몇 개의 돼지 농가가 협동해 넓은 부지에 숙소와 식당을 만들고 각종 가게와 공방들을 만들며 점차 확장해 왔다.


초창기 모쿠모쿠 농장을 만들었던 사람들
초창기 모쿠모쿠 농장을 만들었던 사람들

모쿠모쿠 농장 안내지도
모쿠모쿠 농장 안내지도

사실 여기는 장애인 일자리에 관련된 곳은 아니다. 전체 직원의 70%가 여성이고, 농장의 회원들을 팬클럽이라고 부른다는 점이 이색적이라 관심이 갔다. 평일에 간 탓인지 한적했다. 다만 조식을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 한 편에 나무 접시가 잔뜩 쌓인 것을 보니 주말이나 연휴 즈음에는 꽤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듯 했다. 평일과 주말의 불균형적 수요로 인해 직원 운용이나 공간 확장, 전체적인 관리 등에 많은 고민이 필요해 보였다.


온라인 판매나 각종 이벤트 사업에서 수익을 내는 곳이다. 특별한 아이디어만 있다면 농산물 판매 외에 수익구조를 다각화하여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지 않을까.


각종 체험과 다양한 생산물을 담은 사진들
각종 체험과 다양한 생산물을 담은 사진들

네 번째 방문-오사카부립대학 식물공장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2008년 지하실 식물공장을 시작한 후 10년간 이와 관련한 수많은 손님을 맞았다. 식물공장 관련 박사와 교수들, 농진청 관계자들, 서울대 박사과정 친구들의 실험실까지…. 나는 커피만 들고 왔다 갔다 했음에도 식물공장이 무엇인지 대충 감을 잡고 있던 터라 오사카부립대학 식물공장에 방문할 때 약간 마음이 설렜다.


오사카부립대학 식물공장은 2011년 3월에 발족했다. C20동은 경제 부처에서 지원했고, C21동은 농수산부, C22동은 2014년 9월 정부 지원으로 지어진 연구단지라고 한다. 엄청난 규모였다. 한때 미국에서 어린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는 듯 했다.


양상추를 대량 생산하는 식물공장
양상추를 대량 생산하는 식물공장

이곳에서 생산되는 작물 중 하나가 양상추다. 양상추에 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좀 있다. 우리 스마트팜에서도 양상추를 키웠는데, 아무리 공들여도 결구가 안 되는 것이다. 양상추가 공처럼 동그랗게 겹겹이 싸이지 않고 헐렁한 상태로 자랐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곳 오사카부립대학 식물공장에서 대량 생산되고 있는 양상추가 딱 그러했다. 이미 7년 동안 연구하고 생산해 왔고 예쁘게 포장해 판매도 하고 있단다. 그럼 이곳의 소비자들은 저것을 양상추가 아닌 다른 종류의 채소라고 생각하나 싶어 이름을 물어보니 ‘레타스’라고 했다. 그러니 양상추가 분명하다. 일반 양상추와 다른 모양에 소비자 불만이 있을 것도 같은데 어차피 무게에 따라 가격이 매겨지니 상관없단다. 그럼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까다로운 것인가. 우리는 대형마트 납품을 시도할 때마다 퇴짜 맞았다.


식물공장에서 생산된 양상추. 가격은 한 봉에 150엔이다.
식물공장에서 생산된 양상추. 가격은 한 봉에 150엔이다.

식물공장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하지만 지금처럼 농업환경이 계속 변화한다면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다. 푸르메재단에서 꿈꾸는 스마트팜이 완전한 밀폐형 식물공장은 아니더라도 그곳에서 파생된 과학적 설비나 시설들이 장애인 청년들에게 어떤 일자리를 줄 수 있을지 전문가들과 함께 고민하다 보면 답이 있지 않을까.


다섯 번째 방문-오사카 농업 위크 박람회



박람회장은 늘 인파에 떠밀린다. 특히 농업박람회 방문자들은 유독 연령대가 높다. 대대로 농사를 짓거나 퇴직 후 새로운 일을 찾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일본은 지난 20년 동안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400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줄었다. 우리나라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외국인 근로자나 60대 이상 어르신들이 없으면 농사짓기 어려울 정도다. 파종기나 수확기에는 가까운 동네에서 인력을 구하지 못해 새벽 4시부터 1~2시간 족히 걸리는 지역까지 버스를 보내 할머니들을 모셔 오기도 한다.


농업박람회를 둘러보면 이런 시대의 흐름이 보인다. 몇 년 전 다녀온 도쿄의 농업박람회보다 규모는 작으나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아이템들이 눈에 띄었다. 노동력을 줄이는 방법, 첨단화된 기계, 새로운 농법으로 이동해 가는 추세를 살펴볼 수 있었다.


박물관 참가업체와 첨단 농업을 설명하는 이스라엘 스마트팜 관계자
박물관 참가업체와 첨단 농업을 설명하는 이스라엘 스마트팜 관계자

준비된 일정은 모두 끝이 났다.


우리는 저녁마다 모여 다음 날 방문할 기관의 정보를 공유했고 그 날 다녀온 기관을 평가했다. 왠지 내 자리가 아닌 듯 했지만 굳이 돌아가면서 의견을 물으니 내가 경험한 농장 이야기밖에 할 말이 없었다. 우리 부부는 10여 년 동안 농장을 붙잡고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못 내고 접어야 했다. 짐짓 웃으며 ‘망했다’고 표현했지만, 마치 마라톤을 뛰다가 체력이 고갈되어 다리가 풀린 채 숨을 헐떡이며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것처럼 그 목적과 동기가 너무 애달프고 쓰리고 아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게 말해주면 좋겠다. 내가 뛰던 달리기는 마라톤이 아니라 ‘이어달리기’였다고. 그럼 그건 망한 이야기가 아니라 ‘경험’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전력을 다해 뛰어서 결승점으로 향하는 그 길이 조금쯤 단축됐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다. 어쩌면 60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우리가 달리던 라인과 같은 방향에서 누군가 이 배턴을 받아주길 간절히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전력을 다해 달렸던 우리의 지난 날이 푸르메와 함께 계속되기를 바란다.
전력을 다해 달렸던 우리의 지난 날이 푸르메와 함께 계속되기를 바란다.

마치 오래된 성당과 아름다운 성을 몇 세대에서 걸쳐 짓듯이 장애청년들의 농업 프로젝트도 그렇게 몇 번의 기회를 거쳐 완성되는 건지도 모른다. 내 아들에게만 집중한 편협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농장이 우리 재산이란 생각도 버려야 한다. 배턴을 넘겨 더 젊고, 강하고, 선한 사람들이 잘해주리라 믿고 응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운영하던 농장을 푸르메재단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 세상은 강자만이 살아남아서 피 터지게 싸우는 곳이 아니다. 홀로 충분히 강하게 살아갈 수 있음에도 선하게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이 있다. 강하고 선한 사람들은 더 많은 사람을 배려하고 더 어려운 사람을 격려한다. 마치 처음부터 함께 살도록 결정된 것처럼. 푸르메재단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이 말한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대신 달리겠노라고.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삼성, SK, LG의 간판을 볼 수 있다. BTS가 나타나면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소리 지르고 열광한다. 언젠가 크리프 리처드라는 미국 가수가 한국에서 공연했을 때 이화여대 학생들이 그렇게 열광했다 하더라! 그건 이미 지나간 얘기가 돼 버렸다. 그만큼 우리나라가 성장한 것이다. 일본에서 돌아오니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이란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이것이 지금 자랑스러운 우리나라다.


우리 딸은 바비인형을 경상도 말을 빌자면 ‘천지 빼깔’로 가지고 놀았다. 뒤늦게 한국에서 출시된 ‘미미인형’도 바비인형 못지않게 정교하고 예뻤다. 바비인형 하나에 충격받았던 나의 열두 살 시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새로운 세대는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내 방에서 볼 수 있다. 아무거나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부러워할 만한 것의 가치를 따진다.


비교적 짧은 일정으로 돌아본 일본이지만 염려하던 바비인형의 신발을 보지는 못했다. 세 살이 넘도록 걷지 못하는 아들을 안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그 젊은 엄마는 이제 머리가 하얗게 셌다. 일본의 선진문물이 놀랍지 않은 걸 보니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이 적지는 않은가 보다.


푸르메재단이 장애청년들을 위한 스마트팜을 구상한다는 정보를 온라인에서 우연히 접한 후 심장이 떨렸다. 드디어 왔구나. 우리에게도 이런 사회적 용기가 생겼구나. 세월이 흐른 만큼 우리나라도 성장했구나 싶었다.



오랜 역사에서 장애를 안고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부모의 보호만이 전부였다. 그러나 사람은 진화한다. 더 선하고 중요한 가치를 깨닫고 더 좋은 사회, 더 살 만한 나라를 만들면서 약자를 돌보는 방법을 배웠다. 경쟁하면서도 배려를 배우고, 치열하게 살면서도 한순간 내게도 닥칠 수 있는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는 것으로 풍요를 넘어 풍성한 삶을 만들어 왔다. 물질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고귀한 가치다.


강하고 선한 이 사람들은 제때 치료가 필요한 장애어린이들을 위해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건립한 것처럼 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줄 것이다. 훌륭하게 성장해온 한국이 지금껏 우리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이 결코 인색하기 때문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국민이 낸 세금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할까 걱정돼서, 정책에 확신이 없어 그랬을 것이다. 푸르메 어린이재활병원과 같은 좋은 모델이 있기에 대통령 역시 권역별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정부도, 사회도 지켜보는 것에서 나아가 격려하고 응원하며 동행해줄 것이다.


‘이어달리기’의 첫 주자였던 우리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 응원석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우리 팀이 조금 늦게 달려도 실망하지 않을 생각이다. 우리는 끝까지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강하고 선한 우리의 달리기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뛰어 마지막 주자가 골인 지점으로 향할 때 우리는 감격해서 얼싸안고 울지도 모른다.


모든 장애인 부모의 마음을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이어달리기 선수들이십니다. 이제 그 배턴을 넘기니 잘 부탁드립니다.


*글·사진= 장춘순 이사 (우영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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