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토요일의 산책



1996년의 일이니, 벌써 십년을 훌쩍 넘어섰다. 보좌신부 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간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이다. 나는 독일 옛 수도 본(Bonn) 근처, 상 아우구스틴(St. Augustin)이라는, 이름부터 지극히 ‘가톨릭적’인 동네에 있는 한 수도원에 방을 얻어 어학과정을 밟고 있었다. 음식도 입에 맞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고, 기후마저 낯이 설어 하루하루가 힘겹던 시절이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독일어는 너무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말을 배워야 이 곳에 살아갈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근근이 버티어 가고 있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 나를 제일 많이 위로해 주었던 것은 집만 나서면 아름드리 나무 사이로 펼쳐져 있던 아름다운 산책길이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로 기억하고 있다.


오후 서너시쯤 되었을까? 독일어 공부에 머리가 아파올 즈음, 맑은 공기나 쐬자며 산책을 나섰다. 산책길에 들어서자 나보다 앞서 할머니 한 분이 애완견 – 요즘은 애완견이 아니라, 반려견이라고 한다 – 한 마리를 줄에 묶은 뒤 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할머니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길도 좁았고, 급한 일도 없었기에 여유롭게 호주머니에 손 꼽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야말로 편안한 산책이었다. 할머니가 조금 있다가 줄을 풀어주니 이 녀석이 쪼르르 달려가 일을 보고나선, 뭐가 신기한 게 있는지 이리 저리 킁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더니 할머니가 다시 뭐라고 하더니 쪼르르 달려와 줄에 묶이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내 뇌리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 하나. ‘아, 저 강아지도 알아듣는 독일말을 내가 못알아 듣고 있구나’ 하필이면 그런 생각이었을까? 독일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건 분명했다. 독일에 온 지 몇 달이 지났건만, 책을 보거나 알아들을 수 있기는 커녕 여전히 물건 하나 사기도 힘이 들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런 생각까지는 할 필요가 없었는데. 그 산책 내내 그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 이게 인간이구나. 인간의 위대함을 수없이 들어왔건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이 또 인간이구나.’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 가져다 주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드는 생각 하나. ‘이래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야 했구나. 불과 몇 천 킬로 떨어져 있을 뿐인데, 말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달라 쩔쩔매어야 하는 존재가 인간임을, 그리고 이런 인간의 본연적인 조건을 함께 하고자, 인간이 되셔야 했구나. 이게 성탄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이구나.’



체험은 잠시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는 법이다. 그 때의 그 체험이 독일 생활 전체를 움직이게 만든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더불어 ‘인간’이라는 단어가 가져다 주는 새로운 느낌도 얻을 수 있었다. 마르티 하이데거란 철학자가 왜 인간을 세상 한 가운데에 불쑥 ‘던져진 존재(Geworfenes Sein)’이라고 했는지, 그렇게 던져진 존재가 이제 스스로를 어떻게 던지면서 살아가는지에 대한 물음도 새롭게 바라보게 해 주었다.


이 ‘인간임’이 만들어내는 과제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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