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성 장애인 이야기


 


 


 


 


때로는 겉으로 표현된 몇 마디 말보다도 삶 자체가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경우가 있다. 몇 년 전에 인연이 되었던 여성 장애인이 나에게 그러하다.


몇 년 전, 군의관으로 경기도 북부 모 지역 군병원에서 복무하던 때였다. 한 달에 한 번 지역에 있는 독거노인, 저소득노인, 중증장애인을 방문하는 의료봉사를 나갔다.


그 와중에 뇌성마비였던 그 여성분을 만났다.

온 몸이 강직으로 굳어져서 매일 마루에 누워만 있었던, 이제 40대에 갓 접어든 그 분은 연로한 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목소리가 맑고, 소녀의 심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처음 방문할 때에는 많이도 수줍어하시더니 세번째 만남부터는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먼저 하곤 하셨다. 그러더니 가끔씩은 “언제 오냐”고 병원에 전화를 해서 날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를 전후해 걷기가 불편하더니, 자리에 눕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병원에서 해줄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그 이후에는 아예 병원을 갈 생각도 안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간 것이 20년은 훨씬 넘었다는 얘기였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아버지 품에 안겨 가끔씩 나가곤 했는데, 돌아가신 이후에는 밖에 나가 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신부님이 한번 밖으로 데리고 가신 적이 있는데 안겨서 가는 것도 싫고, 대소변 문제도 창피해서 그 이후 다시 나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분은 어머님과 단 둘이 살고 있었다. 아마 다섯번째 방문 때였던 것 같다. 고생하시는 어머님을 위로하려고 “어머님이 고생이시네요. 어머님이 아프시지 말아야 따님 돌보시죠”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칠순이 가까우신 어머님이 한 말씀 하신다. "내가 죽지 말아야 되는데, 내가 죽으면 이 녀석은 어떻게 하나. 그게 요즘 제일 걱정이여"


그 분은 온 몸에 강직이 심하셨는데, 더 악화되는 중이었다. 어머님과 그 분에게 “뇌성마비 자체는 어쩔 수 없지만, 강직을 좀 낫게 하는 방법은 없는지, 혹 다른 원인 때문에 증상이 악화되는 것은 없는지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보자”고 몇 달 간 설득했다. 6개월이 좀 지나서였을까. “가서 뭐 하겠냐”며 거부하던 그분이 “그래요, 한번 가 봐요. 좀 좋아질 수 있다면 좋겠는데” 한다.


그 분을 대학병원까지 모시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부대장의 허락을 받고 동행했다. 119 구급차의 협조를 얻어 간신히 병원으로 모시고는 재활의학과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날 병원에서 만난 그 분의 큰언니와 남동생이 내 손을 잡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 하셨다. 형제분들은 사실 그동안 많이 포기하고 살았다고, 최근에는 자식 키우고 하다보니 찾아가보는 것도 좀 소홀했다면서 “선생님 덕에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셨다. 다행히도 그 후 입원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면서 강직이 나아지셨다.


그런데 몇 개월 후 그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장례식장을 찾아갔다. 괜시리 병원 진료를 권유해서 마지막 가시는 몇 개월 동안 불편함만 드린 것 같아 미안했는데, 큰언니와 남동생이 그런다. "병원에 입원하면서 OO님, OO님 하면서 하는 소리 듣는게 너무 좋다고 자랑하더라구요. 대접받는다고. 그러는 게 몇 년만이냐면서..."


두어 달 후였나, 그 분 집을 다시 찾아보았다. 혹 이사 가지는 않았는지, 혼자 계실 어머님은 잘 지내시나 싶어서였다. 마루에 이제는 어머님이 홀로 누워계셨다. “다른 자식과 같이 사시죠”하고 말을 건네니, 그냥 울기만 하셨다. “불쌍히 살다가 불쌍히 갔다”면서, 아직은 여기를 떠나고 싶지 않다고 그러셨다.


그 이후에도 여러 곳에서 방문활동을 하면서 그 분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장애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수십년 동안 집 밖의 세상과는 아예 담을 쌓고 사셨던 분들,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재활치료는 꿈도 꾸지 못하는 분들, 점점 굳어가는 팔과 다리를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사시는 분들. 가족도 마찬가지다. 마치 당신의 잘못으로 자식이 장애인이 되었다는 듯 모든 희생을 홀로 짊어지신 어머니, 내가 먼저 죽으면 어쩌냐고 걱정이 앞서시는 아버지.


내가 군의관 때 만난 그 분. 20년 넘게 병원은 커녕 외출도 제대로 못했던 그 분. 존칭을 듣는 게 기뻐 병원 다니는 걸 좋아하셨던 그 분. 지금 그 분과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장애인의 집을 나서면서 오늘도 생각해 본다. '의사'로서,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임석영


가정의학과 전문의.

행동하는 의사회 대표

중증장애인 케어홈 설립추진위원회 실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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