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이 아닌 축복
...7달간의 휴가(?)를 마치고 지난 1월 4일 정치부 발령과 함께 업무에 복귀했다. 목발을 짚고 다닐 때는 빨리 회복해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언제 휴일이 돌아오는가에만 온 정신을 빼놓고 있으니 사람 마음처럼 간사한 것도 없는 듯 하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어느새 정치부에 온지도 ‘백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내쉬는 숨이 바로 하얀 입김으로 변했던 차디찬 겨울을 넘어 온 천지가 벚꽃의 향에 취하는 완연한 ‘봄날’이 찾아온 것이다. 횟수가 잦아들긴 했지만 요즘도 나를 보고 “이제 좀 걸어다닐 만 하냐”는 말로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반 농담으로 “장애인 등록은 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 나는 “다리는 많이 좋아졌는데 다리보다 더 심각한 곳을 발견했다”고 웃어넘긴다.불치병을 평생 모르고 지나칠 뻔 했는데 최근 일련의 사건을 통해 ‘욕심’만이 가득했던 내 ‘정신적 장애’를 발견해 낸 것은 더할나위 없는 큰 축복이었다.
지난해 봄은 지금 생각해도 기자로서 참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법조 출입을 1년 남짓하면서 ‘황우석 사태’, ‘현대차 비리 사건’ 같은 대형 사건들을 눈앞에서 취재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던 것이다.또한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김선종 연구원, 줄기세포 섞어심기 주도(3월 9일), “현대차, 금융브로커 김재록 씨에게 비자금 15억원 전달(3월 31일)”, “현대차로부터 3억원 받은 정대근 농협회장 긴급체포(5월 10일)”, “현대차 연루의혹 서울시 전 주택국장 자살(5월 15일)” 등 당시 사건의 흐름을 주도하는 굵직굵직한 특종을 연속해서 터트리면서 ‘밥을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을 정도’의 기쁨도 누렸다.그러던 중 5월 20일 언론사 대항 기자협회 축구대회에 출전한 나는 경기장에서 왼쪽 발을 접지르면서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5월 27일에는 타사 후배의 부탁으로 청주에서 결혼식 사회를 보기로 했는데 새신랑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꿈이라고 믿기로 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왼쪽 발가락부터 허벅지까지 감싸고 있는 깁스의 무게감은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우쳐줬다.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독일 월드컵을 새벽까지 지켜본 뒤 그 다음날은 하루종일 자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그저 빨리 지나가주기만을 고대하고 고대했다. 8주간의 깁스생활을 끝내고 물리치료를 받으며 걷는 연습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의 불행은 이제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다. 9월부터 출근하기로 회사에 통보까지했다. 다시 시작이라고 되뇌였다.
...8월 25일, 그날도 여느날처럼 물리치료를 받으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침 일찍 내린 비에 젖은 아스팔트의 냄새도 싫지 않았다. 그런데 또다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파트 계단 옆으로 나 있는 나선형 길로 내려오다 미끄러지면서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만 것이다. 다시 아킬레스건이 파열되고 말았다. 다리가 너무 아팠지만 눈에 맺힌 눈물은 단순한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니었다.아킬레스건이 또다시 파열되면서 재수술을 받고 난 뒤에는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냈다. 베갯잎을 적실 정도로 울어도봤다. 그래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늦봄에 다리를 처음 다쳤는데 추석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었다. 첫눈이 내릴 때 쯤이면 다시 걸을 수는 있는 것일까하는 회의감도 밀려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바라는 것이 많으면 구차해지고 원망만이 느는 법이다.
...어느날 병원에서 눈을 떠보니 내 옆자리에 새로운 환자가 누워있었다. 슬쩍 곁눈질을 쳐다봤더니 중환자였다. 공사장에서 떨어지는 철근 더미에 맞아 어깨, 허리, 다리뼈가 으스러졌다고 했다. 환자의 어머니는 “자식놈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며 울먹였다. 며칠후 중환자 S씨가 말을 걸어온다. 중국 동포인 S는 20대 중반이었다. 천성이 쾌할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에 깁스를 하고 있으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기자 아저씨 왜 맨날 인상 쓰세요? 다리 조금 다친 것 갖고 뭘 그래요? 나도 사는데 아저씨가 그러면 안되죠? 하하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내가 지금 병실에 있는 것을 두고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또 나를 스스로 탓하며 괴롭혀봐야 무슨 득이 있겠는가’ 지금까지 모든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고 했던 나의 무지함을 발견했다. 정답은 내 안에 있었다. 원인을 밖에서 찾지 않기로 마음먹은 순간 숨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지난 날들을 조용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려운 시기마다 용기를 붇돋워준 가족, 특히 부모님의 소중함을 거듭 깨달았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은 것은 일종의 덤이었다. 옛말에 시야가 좁은 사람들은 오늘뜻과 같지 않은 일이 있으면 당장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음날 뜻에 맞는 일이 생기면 또 아이처럼 얼굴이 환해져서 실실 웃는다고 했다. 이는 정녕 나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재수술을 했기에 끝까지 말썽을 부렸던 수술부위 염증도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12월 15일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의 조바심은 내지 않는다. 8인실 병실에 누워 있을 때 환자들은 누구나 아침에 볕을 많이 드는 창가쪽을 선호했지만 나는 싫다고 했다. 창가쪽은 햇볕이 제일 먼저 찾아오지만 동시에 저녁 그늘이 가장 먼저 드는 법이기에... 요즘 여의도 국회옆 윤중로에 벚꽃이 만개했다. 누군가는 지고 말 꽃이기에 더 아름답다고 했다. 우리 인생도 지고 말 ‘꽃’에 불과한데 아무것도 놓치기 싫어 아웅다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내가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닐까? 생활속의 작은 깨달음에서 문득 경건함이 느껴지곤 한다.올해도 어김없이 기자협회 축구대회가 찾아왔다. 지난해 악몽이 떠올라 축구장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악몽이 아니라 축복이었다는 생각에 다시 참가할 생각이다. 물론 선수로 뛸 수 없지만 목이 터질 것을 각오하고 응원의 진수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보여줄 요량이다. 최근 보조기 없이 걸을 수 있다고 자랑하는 중국동포 S에게 양꼬치 구이를 사주겠다고 한 약속도 이 봄에 꼭 지켜야겠다.
최 철_7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했습니다. 01년 봄 CBS 23기로 입사한 후 사회부 경찰팀, 법조팀을 거쳐 지금은 정치부 정당팀에 속해있습니다. 06년 봄 기협축구대회에서 아킬레스건을 다쳐 7개월을 쉬면서 ‘인생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매일 밤 ‘겸손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잊지 않고 있으며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