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말아요! 캠페인] 엄홍길,나는 8000미터에서 희망을 봤다.


내 청춘은 오로지 흰 산 히말라야에 바쳐졌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오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한 철없는 20대부터 히말라야 8천 미터급 14좌 등정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히말라야는 나를 가르치고 길러낸 곳이다.


나는 무수히 많은 실패와 좌절을 했고 많은 동료들을 그 곳에 묻어야 했다. 죽을 뻔한 고비를 수 십 차례 넘겼고 숫한 부상을 경험해야 했다. 인생이라는 거친 등반 동안 내가 배운 것은 바로 대자연과 신의 섭리에 대해 가져야 할 겸손함과 인간의 약함이었다.


내 인생의 등정은 아무것 모르고 시작한 에베레스트 도전에서 시작되었다. 우연히 산에서 만난 선배의 “에베레스트에 가보지 않겠느냐?”는 권유에 호기 있게 승낙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당시 나는 해외원정이 무엇인지, 에베레스트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산 맛을 갓 알게 된 젊은 산악인이었다.


그러나 에베레스트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특히 에베레스트의 겨울 날씨는 너무 혹독했다. 쉽게 생각한 에베레스트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두 번째 에베레스트 도전에서 나는 히말라야의 힘 앞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네팔인 셰르파 술림 도로지가 발을 헛디뎌 목숨을 잃은 사고 때문이었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술림 도로지는 첫 번째 희생자였다. 그는 목숨을 잃을 당시 결혼한 지 7개월 된 스물 두 살의 청년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상이 눈 앞이었지만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죽음을 담보로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한 회의가 밀려들었다. 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산에 오르는 것을 후회했고 ‘두 번 다시 히말라야를 보지 않으리라, 서울에 돌아오면 평범하게 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시간은 가고 또 오는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만물은 생명을 틔우고 인간의 상처도 치유되는 것이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뜨거운 것이 가슴 속에 흐르는 걸 숙명적으로 느꼈다. 젊음이 만들어 내는 그 소용돌이를 견딜 수가 없었다. 또 실패해도 괜찮다. 도전 욕구와 그 젊음의 소용돌이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것이다. 나의 히말라야 대장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998년 올림픽을 기념한 3번째의 도전에서 나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할 수 있었다. 뛰어난 산악 대원들과 함께 했다. 나는 고장 난 산소마스크를 집어 던지면서, 몸을 못 가누어 비틀거리면서도 결국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에베레스트 등정을 끝냈지만 문제는 그 후였다. 나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단지 8천 미터급 산들을 오르겠다는 막연한 목표만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사회의 반응은 기대했던 것보다 냉랭했다. 원정 후원을 받기도 힘들었다. 나는 돈을 벌면서 산을 오르겠다는 생각에서 네팔에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었다. 사업은 성공적이었지만 역시 마음 속에서 나에게 외치는 소리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청춘을 안락함 속에서 흘려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히말라야에 올랐으나 나를 기다린 것은 시련과 시험이었다. 89년부터 93년까지 8천미터급 봉우리에 6번 도전해 6번 실패했다. 특히 낭가바르파트 원정에서는 무리하게 악천후를 뚫다가 동상으로 발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해 오른쪽 첫째 발가락과 둘째 발가락을 잘라내야 했다.


시련은 또 찾아왔다. 93년 초오유-시샤팡마를 오르는 어쩌면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이다. 베이스캠프에서 등반 하려고 하자 악천후가 심해져 중간까지 나아가기도 힘들었다. 나는 루트도 없고 셰르파들도 포기하는 그 곳에서부터 후배 병태와 경태와 함께 단 3명이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등정을 중간에 포기하고 먼저 내려간 병태를 뒤로하고 정상을 정복하였다.


죽음이 스쳐 지나가는 기적 속에서 캠프에 돌아왔으나 먼저 출발한 병태는 돌아오지 못했다. 철수 날이 되자 우리는 사진을 펼쳐놓고 제사상을 차렸다.


울면서 “너를 만나러 다시 오마. 그때까지 편히 잠들어 있어라”라며 다짐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을 울었다. 95년 카트만두의 술집에서 만난 산악영웅 카르솔리오 덕분에 나는 새로운 목표를 세울 수 있었다. 14좌 완등을 목전에 두고 있던 카르솔리오는 나에게 “8000 미터 이상의 산을 몇 개나 올랐느냐, 한국에서 가장 많이 오른 사람은 몇 개나 올랐느냐”라며 노골적으로 자존심을 건드렸다.


하지만 나는 4개밖에 오르지 못했고 기록이 없으니 할 말도 없었다. ‘수모 아닌 수모’를 당한 후에 내가 8천 미터 14개를 올라 수모를 되갚아야 후배들도 나와 같은 치욕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일 내가 8천 미터 14좌 완등을 해낸다면 그것은 나의 기쁨이기 이전에 한국 산악인들의 영광일 것이었다. ‘해낸다. 할 수 있다. 14좌 완등을 못할 이유가 없다.’며 혼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나푸르나에 4번째 오르는 길에 나는 죽음 문 앞까지 다녀왔다. 일명 화이트 아웃이라고 부르는 가스나 눈에 의한 시계(視界)상실, 그 안에서 네팔인 셰르파 두 명이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로프로 서로 연결된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그들의 로프를 잡으면 나도 함께 추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로프를 잡았고 손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버티다가 함께 굴러 떨어졌다. 다행이 우리는 목숨을 건졌으나 나의 발은 발목이 180도 꺾여 뒤로 돌아가 버렸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부목을 대고, 걷지 못하면 구르고, 구르지 못하면 기어서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왔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살아 내려온 걸 보고 기적이라고 했다.


의사는 수술 후에 제대로 걷기까지 일 년이 걸릴 것이라고 했고 등산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14좌의 꿈이 좌절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송충이가 솔잎을 먹고 살 듯, 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나였다. 집 앞 도봉산, 북한산에서 시작하여 로키산맥까지 등반에 성공하며 세상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 시켰고 14좌 중 남은 4개 봉이 그 다음 목표가 되었다.


남은 4좌를 오르면서도 나는 대원들을 많이 잃었다. 생방송 중계로 진행된 칸첸중가 등반을 함께 하던 KBS 현명근 기자와 한도규 대원이 그들이다. 이들의 사망과 몇몇 대원들의 중상은 철수할 것인가 등반을 감행할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하였다.


우리의 등정에 대한 집념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걸음은 결국 정상까지 다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2000년 봄에 다시 그곳을 찾았고 나는 또 한 명의 친구를 잃었다. 다와 따망이라는 형제 같았던 셰르파가 설빙에 머리를 맞고는 얼음바닥에 머리를 찧고 그 후유증으로 결국 일어나지 못한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을 시작한 뒤로 벌써 8명의 동료가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나 자신이 무서웠다. 죽음을 넘어서 기어코 산에 올라야 하는 것인지 회의가 밀려왔다.


그러나 답은 명확했다. ‘올라야 한다. 죽도 밥도 안 되는 원정이 되어서는 안된다.’ 고산등반의 금기인 8천미터 이상에서 야영을 하면서까지 집념을 불태웠다.


8천5백 미터에서 야영을 하면서 죽음의 그림자가 내 몸 속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고 느끼게 되었다. 죽음을 받아들이자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졌고 그 동안 살아온 생이 영화처럼 지나갔다. 가족에게 들리지도 않을 유언을 남겼다.


“지은아! 현식아!, 먼 훗날 아빠를 이해해주렴. 그리고 당신, 두 아이를 꿋꿋하게 키워주기를…..”


해는 다시 떠올랐고 우리는 칸첸중가의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준비해간 죽은 대원들의 사진을 눈 속에 묻고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영을 위로했다.


14좌를 모두 밟고 돌아온 일상은 허탈감만을 주었다. ‘너무 일찍 목표를 지나친 건 아닐까’ ‘더 이상 살아 남아 있을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하는 느낌이었다. 술독에 빠져서 숨진 동료들을 생각하며 우는 일상을 계속하다가 새로운 목표를 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에서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히말라야 16좌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동료 대원들의 죽음과 숱한 좌절들 속에서, 이제 그만하라며 거듭하여 실패를 떠안기는 대자연을 향해 또 새로운 목표를 만든다. 그렇다. 좌절과 고통이 나에게 살아갈 의미와 목표를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나는 내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산을 오르고 또 오를 것이다. 왜냐하면 산이 거기 있고 나를 부르기 때문이며 내가 산을 올라야 할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엄홍길


한국 외국어대 중문과 졸업.1985년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등반을 시작으로 1988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2000년 7월 31일 K2에 오르며 우리나라와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의 8000미터급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르는 신화를 창조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4년에는 8505미터 얄룽캉봉에 오르며 세계최초 15좌 등정에 성공했으며 2007년 4월에는 14좌의 8000미터가 넘는 2개의 위성봉우리 등정에 도전한다. 끔찍한 고통과 부상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한 그에게 2001년 대한민국 산악대상이 수여됐다. 엄홍길은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오르고 나면 그곳에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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