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말아요! 캠페인] 김성수,열 여덟에 꺼지지 않는 꿈







내 나이 올해 일흔 여덟이니 고희(古稀, 70세)를 훨씬 지나 산수(傘壽, 80세)를 향해 치닫고 있다. 되돌아보면 적지 않게 살아왔다. 언제 하느님의 부름을 받을지 모르는, 내가 걸어온 생을 정리해야 할 나이이다. 살아오는 동안 미련과 아쉬움이 왜 없을까마는 그래도 큰 죄를 짓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에 늘 감사한다. 어쩌면 내 인생의 시계는 1948년 열여덟의 나이에 그쳤을 수도 있었다.

아마 지금은 모두에게 잊혀진 홍안의 안타까운 삶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불행 속에서 희망을 보았고 이로 인해 그로부터 60년을 더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원컨대 내가 남은 생애 동안 바라는 것이 있다면 큰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요,

사회적으로는 가난과 장애라는 이중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정신지체장애인과 장애환자들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재활병원과 보금자리가 건립되고, 따뜻한 후원의 발길이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 내 인생의 가장 큰 시련 =
내가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을 맞은 것은 18살 때였다. 이때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큰 실망과 고통을 안겨드렸다. 배재중학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절이었다.


대학 진학을 바로 눈앞에 두고 내 인생에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이스하키 경기 도중 갑자기 각혈을 하고 쓰러진 것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운동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강화도 온수리에서 태어났지만 어머니의 뜨거운 교육열 덕분에 서울 교동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학교에서 유명한 개구쟁이였던 나에게 공부는 뒷전이었고 특별활동이 중심이었다. 이 덕분에 보이스카웃과 군사훈련 대대장까지 특별활동을 해봤다.


배재중학 입학 후 해방이 되고 친구들과 아이스하키부를 만들어 창경원 특설 링에서 시합을 했다. 당시 김구 선생님이 자주 경기를 구경하셨는데 기골이 장대하셨고 하얀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신 모습이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나도 40년이 넘게 중절모자를 쓰고 다닌다. 그런 꽃다운 나이에 나는 아이스하키 경기를 하다 각혈을 하고 쓰러진 것이다. 폐결핵 3기라고 했다.


지금이야 결핵 하면 나을 수 있는 병이지만 당시에는 죽을 병으로 여겨졌다. 하루 한 바가지의 피를 쏟으니, 친척들도 모두 죽으려니 했다. 폐병쟁이가 났다고 하면 동네 사람들이 도망갈 정도였으니 맏아들인 나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어머니는 힘겨워하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나는 자식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당시 결핵은 집안을 망해먹고 자신도 죽는 병이었다. 약값도 조금 과장하면 당시 마이신 한 알 값이 쌀 한가마니에 이를 정도로 비쌌다.


꽃다운 나이에 병석에 누워 10년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도 힘겹고 불행한 일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로 인해 가세가 기울고 있다는 죄책감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었지만 그마나 쉽지 않았다. 우리 할아버지가 일찍이 성공회에 귀의해 온가족이 교회에 다녔는데 나를 위해 모두 열심히 기도해 주었다.


해방에 이어진 6.25전쟁, 그리고 전쟁의 종전과정을 거치면서 친구들은 대학을 들어가고,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려나갔지만 나는 10년 가까이 어두운 골방에 누워 지냈다. 내 청춘이 가는 소리를 들으며 병마와 싸운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내가 꿈을 가질 수 있다면, 내가 살 수 있고 건강해질 수 있다면, 나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다. 절망 속에 내 삶을 포기하지 싶지 않았다.



◇ 기적을 부른 기도 = 잠시 일어나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보내야 했다.

기도와 시간은 기적을 낳는 것일까. 병석에 누운 지 8년 만에 몸이 조금씩 낫기 시작했다. 기동을 하게 되자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의 수원지점에서 일을 돕게 됐다.


때마침 성공회 교회의 빈 방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이 있었다. 내가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보고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시몬은 신부님이 되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은 내 운명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결핵으로 쓰러진 것이 나를 성공회 신부로 만들기 위한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세대 신학과를 수료한 이후 나는 성공회 신부가 되기 위해 <성미가엘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성미가엘 신학교>에 재학 중 탄광촌과 영산강 간척사업현장을 찾았다. 노동자의 삶을 알기 위해 위장 취업을 한 것이었다.


지하 수백 미터에서 더위와 싸우고 있는 막장 인생과 하루 종일 일해도 꽁보리밥 한 그릇을 겨우 먹을 수 있는 가난한 굴레를 체험하면서 나는 앞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다.


1964년 사제 서품을 받았으니 신부가 된 지 올해로 43년이 된다. 주교님의 명령으로 성공회대학교 내 정신지체장애 어린이 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맡게 됐다. 그들이 가진 영혼의 순수성을 깨닫게 되면서 내가 인생의 빚을 갚을 기회가 왔다고 믿었다.


이들이 졸업한 뒤 오갈 곳이 없게 되자 선친으로부터 받은 강화도 온수리에 정신지체장애인 직업생활공동체인 <우리마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베르로학교> 교장과 <우리마을> 원장을 맡아 10여 년 동안 정신지체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운이었다.



◇ 재활전문병원 건립이 남은 삶의 목표 = 이제는 140만 장애환자를 위한 푸르메재단이 준비하는 재활전문병원을 세우는 것이 남은 삶의 목표 중 하나이다. 장애환자들이 마음놓고 생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병원이 세워질 날을 꿈꿔본다.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 대기업 부회장 등을 만나 이런 병원이 정말 필요하다고, 누구나 한순간에 장애환자가 될 수 있다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대기업이 함께 나서지 않으면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고 설득했지만 그들은 아직 그 심각성을 모른다. 아직 갈 길이 멀고멀기만 하다.


내가 장애인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아내 프리다 덕이 크다. 1967년 일본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가했다가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영국 성공회 선교사로 파견돼 일하고 있었다. 프리다는 일본 사람들이 키가 작아서 모두 눈 아래 보였지만 내가 처음으로 자기 눈 위로 보여서 선택하게 됐다고 웃는다.


18살에 만난 불행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성직자로서 다시 태어나 살게 된 것은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젊은 시절 결핵을 앓지 않았다면, 나는 술 담배를 가까이 했을 것이고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나는 가끔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하고 간구한다. 이것은 내가 죽기 전에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위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프고 힘든 사람을 도와주고 배려하는 사회가 한국사회에 실현됐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김성수 주교 / 푸르메재단 이사장 / 성공회대 총장
연세대 신학과와 성공회대 전신인 <성미가엘 신학교>. 1964년 성공회 사제로 서품을 받은 뒤 1984년 성공회 주교, 1990년 대주교를 역임했습니다. 정신지체아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와 유산으로 받은 강화도 선영에 직업재활근로시설 <우리마을>을 설립하는 등 정신지체장애인을 위한 복지사업에 평생을 바쳐왔습니다. 2005년부터 민간 재활전문병원의 설립을 위해 <푸르메재단> 이사장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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