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말아요! 캠페인] 김창완, 좌절과 용기는 왼발과 오른발
김창완 "좌절과 용기는 왼발과 오른발" | ||
[푸르메재단 Don`t Give Up 희망나눔 캠페인] | ||
아침에 눈 뜨면 밥숟가락 놓기 바쁘게 신발 꿰고 나가서, 해 떨어지고 나야 겨우 집에 기어들어갔던 어린 시절…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놀아도 늘 하루 해가 모자랐고, 놀아도 그럭저럭 노는 법 없이 코에서 단내가 나도록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해 놀았다. 땅거미가 내리고 집집마다 밥 먹으라고 고래고래 불러야 겨우 마지못해 저마다 집으로 기어들어간 애들은, 다음 아침이 밝아 다시 신발 꿰고 뛰어나가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어른들의 세상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곤 했다. 그 시절, 누구네 집 할 것 없이 어느 집이나 아버지는 술 취하고 어머니는 억척스러웠다. 어른들이 풍기는 무기력과 악다구니의 냄새가 진동하면 할수록, 애들은 더더욱 노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1950년대, 60년대, 온 세상천지에 생기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자기 자신들밖에는 없었던 어린 생명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렇게 스스로 살아 남는 법을 알았다. 먹고 살기 힘든 어른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눈이 빨개서 놀 궁리만 한다”고 야단치기만 했지, 누구 하나 그 속내를 들여다봐줄 여유는 없었다. 독가스처럼 퍼져 있는 우울 속에서 그나마 숨통을 트고 살아 남기 위해서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놀았던 우리 어린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참 대견하다.
유난히 뜨거웠던 올 여름, 무더위가 절정일 때 충북 영동 시골마을에서 드라마 촬영이 한창이었다.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돼지우리를 봤다. 그늘에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한낮에, 좁은 우리 안에 오물을 뒤집어쓴 돼지 두 마리가 고통스럽게 뙤약볕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늘 한 자락 없는 우리 안에서 돼지들은 버둥거리며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파내려간 땅바닥은 상대적으로 좀 덜 뜨거운 모양이었다. 겨우 손바닥 두 개만큼 땅이 파헤쳐지면 거기에 머리를 박고 뒹굴다가, 또 이내 그 옆의 땅을 파헤치고 뒹굴고, 자리를 옮겨가며 쉬지 않고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손바닥만하게 헤쳐낸 땅이 그 큰 몸뚱이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마는, 돼지들은 필사적으로 흙을 뒤집고 있었다. 용접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처럼 내리쬐는 땡볕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를 많이 보고 듣고 하지만, 사실은 그 주인공들은 역경을 ‘이겨낸’ 것이 아니라 그 전에도, 그 뒤에도 하루하루 날마다 역경을 ‘이겨내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희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어느 날, 어느 한 순간 갑자기 해탈하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절망 속에 빠져 있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당장 그 다음날부터 절망스러운 상황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상황은 어제와 똑같다. 내일도, 모레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계속 이어진다. 이제 두 번 다시 좌절하지 않겠다는 식의 ‘마음먹기’로는 역경을 이겨낼 수 없다. 아무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무리 눈에 핏발이 서게 결심을 해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또다시 우리를 덮치고 만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이나 “좌절 끝, 희망 시작”은 선언으로서는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어림도 없는 얘기다.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나. 어떻게 절망을 안 하나. 좌절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가 나약해서 좌절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이거 하나만 알고 있으면 된다. 절망과 희망은 들숨과 날숨 같은 것이라는 것. 숨을 들이쉬었으면 그 다음에는 내쉬는게 이치가 아닌가. 지금 절망에 빠져 있다면 이제 희망이 보일 차례다. 좌절과 용기는 왼발과 오른발이다. 왼발을 내딛었으면 그 다음에는 오른발을 내딛어야지. 이제 오른발을 내딛을 차례다. 얼마 있지 않아 또 좌절이라는 왼발이 기다리고 있겠지.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그 다음엔 어김없이 용기를 내딛게 될 테니까… 딴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 불행할 수 없다는, 내 사전에 좌절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욕심일 뿐이다. 이런 욕심은 위험하고, 추악한 것이기도 하다. 고통스럽게 삶을 견뎌내고 있는 돼지를 보면서 내 삶이 저 돼지의 삶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는 인간은 얼마나 추악한가. 스스로 자기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불행은 그 울타리 너머에 있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오만인가. 신혼의 남편은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에 끌려나가고, 그 와중에 생떼 같은 자식을 잃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남은 자식들 데리고 살아나갈 수 있을지 기가 차고 막막해서 울음조차 울 수 없었던 우리네 어머니와, 그 기막힌 절망의 흙더미 위에서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하니 머리 맞대고 잘 놀고 잘 자라주었던 아이들… 희망이란 그런 것인지 모른다. 의식하지 않아도 내쉬고 나면 저절로 삼켜지는 숨처럼, 삶이란 게 온통 끊임없이이어지는 고통의 연속인 것 같아도 지나고 보면 정확히 그 고통만큼의 희망과 살맛나는 기쁨이 함께 있었음을, 그래서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 희망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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