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30분

 




박 인 철

(경희대 철학과 교수)


<박인철 경희대 철학과 교수>


이 글을 쓰기 위해 나의 과거의 삶을 되 돌이켜 보면서 내가 가장 힘든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니 단연 떠오르는 것이 내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아직 자리를 못 잡고 있을 때였다. 이 시기가 유난히 힘들었던 것은 경제적인 이유보다 교수공채에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번번이 떨어져서 받게 되는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그래도 상당한 자존감을 갖고 인정받으며 살아 온 나에게 공식적으로 어떤 이유에서이건 탈락이라는 너울은 나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상당히 가슴 아픈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수치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탈락의 고배를 마실 때마다 내가 자꾸 남을 탓하고 나아가 사회와 현실을 원망하며 마음이 비뚤어져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비뚤어진 마음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이때 일어났다. 당시 네 살이던 어린 내 딸에게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때도 내가 한창 무언가를 원망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딸은 엄마가 외국에 있었기에 주로 할머니가 돌봐주고 계셨다. 나름대로 순해서 혼자서도 잘 놀았고 할머니가 정성껏 잘 보아주셨는데 밤에 땅콩을 누워서 먹다 그만 그것이 기도로 넘어 갔다. 처음에는 잘 몰라 괜찮아지겠지 하고 밤새 응급실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응급실 당직 의사들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잠도 잘 잤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해 다음 날 아침 일찍 종합병원 소아과 전문의에게 찾아갔더니 당장 이비인후과에 가서 수술(정확히는 시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고 이후의 과정은 지금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나에게는 혼란 그 자체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 병원에서는 유아용 시술기구가 없다 하여 고려대 병원을 추천해줬다.


 



고대병원에 가서야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소아과 담당 주치의는 처음에는 시술을 한다 해도 이 물질이 너무 깊이 들어가 제대로 완치가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비관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말하자면 평생 고질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시술은 해야 할 것이라는 말에 일말의 희망을 갖고 다음날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이비인후과에서는 다행히 운이 좋으면 기관지 내시경 시술로 완전히 제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막상 시술의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했다.


워낙 내시경 시술이 위험해서 전신마취를 해야 하며 게다가 30분 이상을 못할 뿐더러 만약 수술 중 잘못될 경우 기도가 막혀서 사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내시경이 폐를 건드려 출혈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그 다음 말은 귀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만약의 경우지만 내 딸이 죽을 수도 있다는 그 말. 그 어느 누구한테도 듣지도 못했고 들어서도 안 되는 말을 너무나 쉽게 무방비상태에서 들어야만 했던 나는 너무나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오히려 담담했다. 도무지 실감이 안났다. 시술의 실패 가능성이 단 1%여도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장인어른께서 심장수술을 하시면서 수술의 성공률이 90%라는 의사의 말을 들으시고 안심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의 10%의 불운이 염려가 되어서 유서를 따로 작성하셨다는 말씀이 새삼 가슴에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워낙 시각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인지라 당장 이날 시술결정이 내려졌고 다음날 오전 수술실로 향하게 되었다. 어린 내 딸은 나랑 떨어지는 것을 무서워해서 나는 수술실까지 딸애 침대에 같이 누워 들어갔다. 딸애는 항상 인형을 갖고 다녔는데 그것도 같이 갖고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수술실에 들어가자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지금도 이 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사실 난 어린 딸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기 위해 웃는 모습만을 보여주려 했고 따라서 단단히 마음을 다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딸 지우는 눈을 감고 있어 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한 수술담당 간호사가 안스러웠는지 따뜻한 위로를 해 주었다. 괜찮을 것이라고. 그런데 바로 뒤이어 침통해해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마취의사는 오히려 이 시술이 위험한 수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나보고 어쩌라는 것인지.(아직도 그 때 상황에서 이 간호사와 마취의사의 태도 중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이었는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 천사 같은 마음씨를 지녔을 것 같은 간호사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수술실에서 나온 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외국에 있었던 애 엄마까지 포함해 온 가족이 할 수 있는 것 또한 기도가 전부였다. 시술시간이 30분 이상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30분 동안 난 전력을 다해 기도했다. 가톨릭 신자로서 기도에 비교적 익숙해 있었던 나였지만 이 시간만큼은 마음을 가다듬고 절실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 때의 기도 내용은 잊었다. 하지만 요지는 ‘내가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잘못 없는 내 딸에게는 아무 일도 없게 해주시고 대신 나를 벌해달라’는 것이었다. 기도 도중 나는 스스로를 많이 반성했고 당시에 취직에 민감해 남 탓만을 했던 나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내가 오만해서 이런 불상사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해 딸 지우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절박한 심정이었다.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다행히 시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때 만큼 의사에게 고마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더욱 고마움을 느껴야 할 존재는 하느님이었다.


어쩌면 남에게는 하나의 가벼운 해프닝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는 이때의 일 이후에 나는 항상 어떤 부채의식을 갖고 살고 있다. 바로 그 짧다면 짧은 30 분 동안에 신에게 드린 기도와 약속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간사한지라 그 때의 절박한 심정은 많이 희석된 채 나는 여전히 잘난 척하면서 이기적인 속내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행복할 때마다 그리고 그 반대로 너무 힘들 때마다 나는 오히려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계실 그 분의 시선을 의식하며 스스로를 추스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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