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수 같은 장애인을 기대하며
최 병 훈
(푸르메재단 간사)
그저 혼란스러웠을 뿐이다. 그를 남자로 여겨야 할지 여자로 여겨야할지? 이러저러한 르뽀에 트랜스젠더들의 이야기가 이미 여러 차례 보도되었지만 나에게는 그저 지나가는 사건에 불과했다. 가볍게 보고 듣고 아니면 다른 세상의 호기심거리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TV에 등장하고 나서 그리고 내가 즐겨보는 오락프로 마다 여지없이 모습을 들어내면서 나는 한동안 혼란스럽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유보된 가치판단.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아니 어쩌면 죽을 때까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지냈을 것이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그들을 만날 일은 거의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가 TV 브라운관에 침투를 시작하면서 나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를 남자로 여겨야 할지 여자로 여겨야 할 지 말이다.
그것은 참으로 머리 아픈 일이다. 음, 생리학적인 연구나 사회심리학적인 현상들도 고민해 보아야 하고 또 인간과 性역할의 문제 또 교육적인 문제들 하며. 한마디로 그의 등장은 내게 있어서는 문제투성이였다.
그런 내게 그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채널마다 S라인의 쭉 빠진 몸매에 미스코리아 뺨치는 외모를 하고 나타나서 자신을 ‘이경엽’이 아닌 ‘하리수’로 보아달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매스컴의 위력은 이런 것인가? 그토록 혼란스럽던 내게, 아직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내 머리와는 달리 내 눈은 내 무의식은 어느새 여자 '하리수'에 너무도 쉽게 익숙해져 버리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의 남자친구 소식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이따금 드러나는 허스키한 보이스에도 애교로 보아주는 여유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그런 현상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보수적인 법원에서 마저 ‘그’를 ‘그녀’로 정정해 주지 않았던가. 트랜스젠더의 오랜 숙원이자 염원이었을 이번 판정은 사실 ‘하리수’의 역할이 아니었으면 이끌어내기 힘든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인 스스로 그런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투쟁하듯이 방송에 진출하지야 않았겠지만 결국 그녀의 활동이 역사적인 판결을 이끌어 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성의 상품화니 변태적 욕구의 충족이니 말은 많지만 정작 한 인간으로써의 권익의 문제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탁상담론일 뿐이다. 문제를 여론화하고 또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많은 모델 중에 이번 트랜스젠더 문제와 관련해 하리수의 역할은 참으로 주목할 바가 많은 사건으로 다가왔다.
장애인 인권과 관련해 선진국과 차이점을 들 때마다 가장 많이 드러나는 문제는 사회적 인식이다. 장애인들의 복지나 의료 시스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으로 대우받고 살 수 있는 인식환경의 개선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문제가 아닌가? 동등한 사람으로서 존중 받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밖의 문제들이야 말로 제도를 뜯어고치면 되는 일들일 뿐이다.
장애인 470만. 인구의 10명 중 1명이 장애인인 우리나라에서 수치대로라면 오늘 길을 걷다 마주친 열사람 중 한 사람은 장애인이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거리에서 만난 장애인 숫자대로 라면 우리나라는 장애인이 가장 적은 국가일지 모르겠다. 이동권과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크지만 고치도록 만드는 인식 개선의 문제가 먼저이다. 누구든 건물을 지을 때, 도로를 만들 때, 계단을 만들 때, 붕어빵에 팥고물 넣듯이 당연히 장애인 편의시설을 떠올릴 수 있는 인식 개선이 가장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문제가 아닌가?
그러면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비장애인들에게 장애인도 당신과 똑 같은 욕구와 정서를 가진 같은 인간이라고 누가 항변할 것인가? 그것은 그렇게 투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럴수록 거부감은 더하고 사람들은 더욱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하리수’의 경우의 나처럼 장애인에 대해서도 어떤 가치판단도 내릴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판단유보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만큼 주위에서 장애인을 찾아 보기 힘들고(꼭꼭 숨어버린 탓에, 수많은 장애물 탓에), 이따금 그저 스치듯 혹은 특정한 날 행사나 일회적 스케치 정도로 그들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뇌성마비 장애인들을 처음대할 때의 거부감이나 심한 안면화상환자를 만났을 때의 당혹감이란 것은 사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처음 할 때 누구나 느끼는 당연한 감정이다. 이는 무시나 비하도 아니고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아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달을 지내며 부대끼기 시작하면 자연히 사라질 첫 대면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자연스러운 느낌일 뿐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소견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뛰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은 바로 그 ‘초면의 당혹감’이라 생각한다. 첫 데이트의 가슴 떨림과 첫 출근의 두근거림은 아닐지라도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익숙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자주 그리고 지속적으로 주어질 수 있다면 안경 쓴 사람을 아무도 장애인 취급하지 않듯이 여드름 때문에 얼굴을 모자와 스카프로 동여매지 않고 다니듯이 단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서로를 딴 세상사람 취급해야 하는 이런 불합리한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 벽은 누가 깨뜨릴 것인가? 나는 감히 장애인들 중에서도 ‘하리수’와 같이 용감한 누군가가 나타나길 기대한다. 그것이 성의 상품화든 상업 방송의 폐해일지언정 용감히 드러내놓고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서서 고개 돌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아주 서서히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침투해서 어느새 아주 익숙했던 듯 친근하게 느끼도록 점!령! 하는 멋진 일이 일어나길 기대한다.
최병훈/푸르메재단 행사기획담당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