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혈 가수 인순이
마흔 중반의 나이에 후배를 위해 래퍼를 하고, 라이브 무대에서의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관객들의 심장을 파고들고, 어느새 관객과 가수가 하나 되게 하는 열정적인 무대를 이끌고 있는 가수, 인순이 씨.
인기 연예인들이야 의례 갖는 매스컴의 인터뷰가 일상적이지만 그는 요즘 때 아닌 인터뷰 세례에 시달리고 있다. 다름 아닌 하스인 워드 방한이후 같은 혼혈인으로서 경험한 냉대와 멸시, 그리고 12살짜리 딸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느끼는 혼혈 자식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순이 씨는 혼혈인 문제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완전히 힘들었겠어요. 완전히 미국인도 아니고, 교민사회에서도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거예요. 힘든 여건이지만 꿋꿋이 노력해 성공한 건 정말 큰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죠.”
그의 삶을 지켜보지 않았어도 인순이씨는 충분히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자신도 한국에 살면서 한참 동안 한국인도 외국인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에서 떠돌아야 했기 때문이다. 데뷔하던 해부터 MBC, TBC 중창단상을 수상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그도 곱슬머리 때문에 방송출연을 거부당해 머플러나 모자를 써야만 했다. 그 모습이 초창기 시절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 당시엔 조숙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남들이 나에게 거부반응이 있을 수 있겠구나’ 하고 이해했어요. 그 땐 우리도 외국사람 보면 신기했으니까... 약간의 섭섭한 감은 있었지만 ‘이해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스스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지요.”
하인스 워드 뒤에는 어머니의 눈물 나는 희생이 있었다. 인순이 씨 역시 어머니의 추억으로 눈물을 훔친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알다시피 가슴 아프고 상처받고 힘들었던 세대들이에요. 혼혈 자식을 둔 어머니일수록 더 힘든 시기를 겪었거나 겪고 있을 거예요. 워드 이야기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그의 어머니였어요. 얼마나 힘들었을까. 갖은 편견에 맞서 아이를 보호하고 당당하게 키우려는 노력들이 한눈에 보이는 듯 했어요.”
밤업소의 가수로 등장해 검은 피부 때문에 화제를 뿌렸던 그는 신중현 사단의 보컬리스트를 거친 후 그룹 희자매를 결성, 1978년 코미디언 서영춘 씨의 리사이틀 무래로 정식 데뷔했다.
이후 솔로로 전향한 뒤 파워풀한 가창력을 선보인 ‘밤이면 밤마다’로 스타덤에 올랐고, 199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백서팀인 ‘인순이와 리듬터치’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 모든 걸 당신이 짊어지고 갔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뜨거운 게 솟구치는 것 같았다’는 인순이 씨. 혼혈아의 어머니는 우리의 이모요, 누이요, 언니로 그 역할을 충분히 다하고 있으므로 박수를 보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창 상종가를 달리던 인순이 씨는 후배 가수들의 발랄함에 밀려나 5~6년 동안 잠시 주춤거렸지만 더욱 연습에 매달렸다. 춤을 추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후배들이 1시간 연습하고 간 자리에서 2시간, 3시간을 더 버텼던 것.
“우리가 150% 노력을 해도 효과는 90%밖에 안 나타나요.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 의무감이 늘 존재해요. 지금의 내가 있는 것도 연습벌레처럼 연습을 했기 때문이에요. 잠재력이 뛰어난 혼혈인이라도 환경의 제약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가 있는 가하면, 혼혈 때문에 이 악물고 더 악착같이 노력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렇게 노력한 인순이 씨를 관객들은 외면하지 않았다. 1980년대 말 가수들의 한결 같은 몰락에도 불구하고 현진영과 박진영의 곡에 백 코러스를 넣어주며 댄스 계의 대모답게 꾸준한 활동을 펼쳤던 그는 열린음악회를 통해 화려한 재기에 성공하게 된다.
굴곡진 우리나라의 과거사 속에서 존대했던 혼혈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하다. 그러나 슈퍼볼 스타 하인스 워드로 인해 사회에 일고 있는 시대의 희생양인 혼혈인에 대한 때 아닌(?) 관심은 인순이씨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성공한 혼혈인 인순이로 모 회사의 CF까지 촬영하게 되었다 하니 그 열풍이 대단한 것임은 틀림없다.
이번 광고를 통해 국내 혼혈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줄 뿐 아니라 국민에게 혼혈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출연했다는 인순이 씨.
혼혈사회를 수용하는 정책 마련과 열린 의식이 하루빨리 시행되어 피부가 검어서 우는 바람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 글을 쓰신 신현주님은 출판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는 자유기고가 입니다. 일간지 사회부 기자를 거쳐 고려원, 수레바퀴의 편집장으로 일했습니다. 현재 포스코, 현대 등 기업 사보와 월간 <좋은 엄마>, 계간 <열린지평> 등의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내가 그린 강물은 까만색」, 장애인들의 글을 모은「나 여기 있노라」등이 있습니다.
이글은 장애인과 함께하는 잡지 <열린지평> 2006년 여름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