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생애를 온전히 품는 우산이 되다
<장애인 복지, 캐나다에서 길을 찾다>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어떻게 가능할까.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은 푸르메재단 조사단이 그 실마리를 찾아 장애인 복지 선진국 캐나다로 떠났다. 장애인의 노후를 위해 국가가 함께 저축하는 세계 유일의 장애인 적금(RDSP) 제도, 돌봄 제공자와 집을 공유하며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홈쉐어 제도, 발달장애인을 위한 사회통합형 임대주택 ‘코러스 아파트’ 등 캐나다의 복지 현장을 살펴보고, 진정한 장애인 복지 선진국을 향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8편>
한 사람의 생애를 온전히 품는 우산이 되다
캐나다의 발달장애인협회, DDA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가 성장해 어른이 되고, 중년과 노년을 지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삶이 단 한 번의 단절도 없이 태어나고 자란 익숙한 곳에서 친숙한 사람들의 지원을 받으며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동기에는 보육과 교육을, 성인기에는 일과 여가를, 노년기에는 존엄한 돌봄을 제공하는 곳이 섬처럼 흩어져 있어 여기저기를 떠돌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촘촘한 우산 하나로 연결되어 한 발달장애인의 인생을 품는다. 이러한 지원 체계를 70년간의 노력으로 캐나다 밴쿠버에서 실현한 곳이 있다.
1952년 공립학교 입학을 거부당한 발달장애 자녀들의 교육권을 위해 12가족의 부모가 모여 시작한 작은 조직이 지금은 직원 600여 명이 연간 1,800여 명의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을 지원하는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캐나다 BC주 리치몬드에 자리 잡은 발달장애인협회(Developmental Disabilities Association・DDA) 이야기다. 푸르메재단 조사단은 하나의 기관이 ‘한 사람의 전 생애’를 어떻게 지원하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배우고자 DDA를 찾았다.

푸르메재단 조사단에게 마크 추버뷜러(Mark Zuberbuhler) CEO가 DDA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동기부터 노년기까지, 발달장애인의 전 생애 지원
DDA의 가장 큰 힘은 협회 산하에 아동 발달 센터, 주간 활동 프로그램과 드롭인센터(drop-in center), 직업 준비 기관(Jobs West), 사회적 기업(Starworks), 주거·생활 지원 서비스까지, 한 사람의 생애주기에 필요한 거의 모든 지원 서비스를 갖추고, 이를 유기적으로 운영하는 ‘우산 조직(Umbrella Organization)’ 모델에서 나온다.
이곳에서는 장애인 이용자가 자신의 나이와 필요에 맞춰 자연스럽게 서비스를 옮겨가거나 여러 서비스를 동시에 이용한다. 예를 들어, 어릴 적 DDA의 통합보육센터를 다니던 아이는 자라서 직업 준비 기관인 ‘잡 웨스트(Job West)’에서 직업훈련을 받거나 사회적 기업인 ‘스타웍스(Starworks)’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일을 마친 뒤에는 드롭인센터에서 주간 활동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여가를 보내고, DDA가 운영하는 그룹홈으로 퇴근한다. 이 모든 것이 DDA라는 하나의 기관 안에서 매끄럽게 연결된다. 이전에 방문했던 기관들이 주로 성인 발달장애인을 지원하는 CLBC(Community Living BC・성인 발달장애인을 지원하는 BC주 정부 기관)의 예산을 받아 움직이는 것과 달리, DDA는 CLBC를 포함해 교육이나 아동복지, 고용 등과 관련된 다양한 정부 부처의 예산을 받아 서비스를 기획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DDA가 운영하는 드롭인센터에서 발달장애인들이 미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유연성은 직원들의 인사 순환을 통해서도 강화된다. 드롭인센터 직원이 스타웍스로, 스타웍스 직원이 잡 웨스트로 이동하며 커리어를 이어가는 구조는 직원들이 기관 간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고 DDA가 제공하는 여러 서비스의 이해와 질을 높이고 있다. 마크 추버뷜러(Mark Zuberbuhler) CEO는 “발달장애인을 위한 전 부문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DDA는 체계적인 직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며 “CLBC의 지원금을 받는 기관의 표준 직원 교육 요건을 따르되 자체 제작한 학습 콘텐츠와 온라인 교육 플랫폼을 제공하며, 철저한 성과 평가와 피드백을 실시한다”고 설명했다.
장애인이 더 안전하고 쉽게 일하도록… 사람에 일을 맞추는 DDA의 철학
DDA는 ‘직업 준비’와 ‘실제 고용’을 효율적으로 분리하고 또 연계한다. 먼저 ‘잡 웨스트(Job West)’는 취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전문 ‘직업 준비’ 기관이다. 발달장애인의 취업을 ‘준비-매칭-현장 적응-장기 지원’의 흐름으로 설계해 이력서 작성법부터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훈련, 동료와 관계 맺는 기술까지 세심하게 지원한다. 취업에 성공하면 직업 코치가 최대 3주간 현장에 동행하며 적응을 돕고, 후속지원 및 재교육, 고용주와의 갈등을 중재 역할까지 맡는다.
잡 웨스트를 통해 준비된 사람들은 DDA가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인 ‘스타웍스(Starworks)’나 지역사회 일반 기업에 취업한다. 특히 분류, 커팅, 조립, 포장 등의 임가공 업무를 하는 스타웍스는 그 유연함이 놀라웠다. 단시간·온콜 스케줄을 운영하여 발달장애인이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컨디션에 따라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한다. 장기간의 치료 또는 휴식이 필요하다면, 몇 개월 쉬었다가 언제든 원하는 때에 일터에 복귀하는 것도 가능하다.

스타웍스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 모습.
스타웍스는 발달장애인이 안전하고 쉽게 일할 수 있도록 작업대를 맞춤형으로 제작했다.
단순한 업무에도 당사자의 특성을 고려한 직무 배치, 철저한 직무 분석과 세밀한 분업, 환경 조정을 통해 가장 일하기 편한 방식을 찾아낸 점은 무척 인상 깊었다. 예를 들어, 기억력이 좋고 꼼꼼한 성격의 발달장애인에게는 밴쿠버 공항에서 수거한 세계 각국의 동전을 분류하는 일을 맡기고, 철사를 똑같은 길이로 자르는 작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보조 도구를 제작해 제공하는 식이다.
직업 및 지역활동 서비스를 담당하는 딘 지바트(Deanne Ziebart) 씨는 “지역 내 캔들 회사의 제품 포장을 맡고 있는데, 초 심지를 만들 때 매우 짧고 미세한 플라스틱 다발을 자르는 과정이 있다”며 “어떤 도구를 써야 발달장애인이 안전하고 쉽게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스타웍스 직원들이 다양하게 시험해 본 끝에 손톱깎이로 작업하는 매뉴얼을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이는 일에 사람을 맞추는 게 아니라, ‘사람에 일을 맞추는’ DDA의 철학을 명확히 보여준다.

스타웍스는 발달장애인들이 업무를 잘할 수 있도록 작업 순서 및 주의사항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한 매뉴얼을 제작했다.
전 생애 걸친 유기적 지원, 우리에게 접목할 새 모델 필요
최근 DDA는 오랫동안 사용해 온 주거지원 서비스(Residential Services)의 명칭을 ‘삶의 선택지(Living Options)’로 변경했다. 발달장애인이 자신에게 맞는 삶의 형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그들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뜻을 더욱 분명히 한 것이다. DDA는 밴쿠버와 리치몬드 지역에 있는 20개의 그룹홈과 장애인 당사자가 소유하거나 임차한 아파트에 생활기술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커뮤니티 아파트 프로그램(CAP), 홈쉐어(Home Share)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당사자의 고령화와 부모 사망으로 인한 돌봄 공백 등 필요에 따라서 CAP와 홈쉐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다가 그룹홈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주거지원 서비스를 받는 동안에는 지역보건국 간호팀의 의료지원과 상담을 받을 수도 있다.
DDA의 지원은 발달장애인이 임종하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CLBC의 지침과 지역보건국 간호팀의 연계에 따라 임종을 앞둔 그룹홈 거주자가 원하면 요양원이나 호스피스 시설로 가는 대신 거주하던 그룹홈에서 존엄하게 생을 마칠 수 있도록 돕는다. 장례는 가족이나 대리인이 주관하되 DDA는 유가족 연락, 동행, 참석 조정 등 지원자 역할을 하고 같은 그룹홈 내 거주자와 직원이 애도할 수 있도록 추모 모임을 마련한다. DDA가 단순한 서비스 제공 기관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진정한 ‘삶의 동반자’임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DDA 방문은 7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축적된 시스템의 힘이 무엇인지, 부모들의 간절한 마음으로 시작된 작은 모임이 어떻게 한 사람의 전 생애를 품는 울타리가 되었는지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고용, 주간활동, 주거 등이 분절 없이 한 개인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우리의 시스템을 어떻게 더 자연스럽게 연결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떠올렸다. 아동기의 재활과 배움, 성인기의 일과 주거, 노년기의 건강과 작별까지 끊기지 않게 잇는 일을 앞으로 푸르메재단이 만들어갈 병원과 복지관, 일자리와 집에 어떻게 더 잘 접목하고 응용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DDA가 보여준 ‘통합’과 ‘연결’의 모습을 길잡이 삼아, 한국 사회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글=김지호 과장(경영기획팀)
사진=푸르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