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발달장애인의 독립심

<독일은 어때요?> 6화_마지막회




"독일은 어때요?" 칼럼니스트 민세리가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독일에서 16년 넘게 거주하며 특수교육학자, 장애인복지전문가, 통번역가 그리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현재 박사과정에 있다. 이번 연재칼럼에서는 독일 발달장애인의 일과 삶에 대하여 생생한 현지 소식을 전달하고자 한다.



독일 발달장애인의 독립심


1년 전 베를린의 한 놀이터에서 겪은 일이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발달장애 아동이 높이가 2m를 훌쩍 넘는 미끄럼틀 입구에서 한동안 주저하고 있었다. 아빠는 다정한 목소리로 아들을 격려했다.


"넌 할 수 있어! 한번 올라가 봐!"


하지만 아이의 팔다리는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아이 뒤로는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아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아빠는 침착하게 아이를 응원했지만 아이는 도무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빠의 이 한마디에 아이는 드디어 발을 뗐다.


"위에서 보이는 세상이 어떤지 아빠한테 말해줘!"


아이의 느린 동작 탓에 미끄럼틀 대기 줄은 계속 길어지고 있었지만 모두가 침착하게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이가 혼자 힘으로 미끄럼틀 정상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환호했다. 아이 아빠도 환호했다. 나도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아이가 스스로 미끄럼틀에 올라갔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지만, 아빠가 옆에서 아이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가운데 아이가 스스로 계단을 오르도록 침착하고 부드럽게 격려하는 모습이 참으로 '독일스러웠다'.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 모습(출처: Unsplash)미끄럼틀을 타는 아이 모습(출처: Unsplash)


독일 부모는 자녀가 어린 시절부터 삶의 다방면에서 혼자 힘으로 도전하고 경험하도록 지지한다. 발달장애 자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 과정에서 많이 넘어지고 다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경험을 통해 발달장애인은 자신감과 자기효능감, 독립심을 키워나간다. 이렇게 다져진 독립심은 성인이 되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 독립적인 삶이란 단순히 부모로부터 떨어져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계획하고 준비해 실행하는 삶이다.


독일은 성인이 되면 부모의 집을 떠나 독립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발달장애인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적인 경우 일반 주택에서 혼자 독립생활을 하겠지만, 대다수의 발달장애인은 크고 작은 거주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로 장애인 거주시설이나 장애인복지기관이 운영하는 일반주택의 그룹홈에서 장애인 또는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간다.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단체생활을 하더라도 이들은 개인침실을 배정받고 화장실 및 욕실(보통 방을 마주하는 두 사람이 공용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거주그룹에는 화장실이 여러 개 설치돼 있다)과 주방, 거실 등의 공간은 함께 사용한다. 개인 침실은 침대와 책상, 옷장, 기타 수납공간 그리고 커다란 창문이 넉넉하게 들어가는 규모이다. 방안의 가구와 소품, 벽면 색상, 그리고 벽면 가득 채워진 각종 사진과 포스터 등을 보면 이 방에 누가 거주하는지 바로 알 수 있을 정도로 각각의 방은 개인의 취향과 개성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이처럼 독일의 발달장애인은 성인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도 하면서 스스로 삶을 일구어 나간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크고 작은 지원이 필요하지만, 모든 지원의 바탕에는 발달장애인의 독립적인 수행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가 깔려 있다.


장애인 그룹홈에서 식탁에 모여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애인과 시설종사자 모습 (출처: https://www.hephata.de)
장애인 그룹홈에서 식탁에 모여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장애인과 시설종사자 모습

(출처: https://www.hephata.de)


독일에 산 지 어느덧 17년이 넘었다. 그동안 수많은 발달장애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연구했지만, 솔직히 말해 필자는 아직도 "독일 발달장애인은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살아가나요?"라는 질문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 장애인의 삶도 무척 다채롭기 때문이다. 이번 연재 칼럼에서 "독일 발달장애인은 이렇게 일하고, 이렇게 살아갑니다"라고 표현하긴 했으나, 실제로 발달장애인 개개인의 삶의 형태와 만족도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단 몇 편의 글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점을 독자들이 꼭 알아줬으면 한다.


또한 그동안 독일에서의 경험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발달장애인 지원과 관련하여 이 점만큼은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다.


앞의 미끄럼틀 에피소드가 보여주듯(그리고 앞선 연재 칼럼의 모든 이야기가 보여주듯) 발달장애인 지원의 핵심은 신뢰와 기다림이다. 발달장애인이 혼자 힘으로 미끄럼틀을 올라갈 수 있다고 믿고, 다 올라갈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야 한다. 물론 끝내 발달장애인이 혼자서 올라가지 못한다면, 그때는 다양한 방식(예컨대 미끄럼틀 높이를 낮추거나 미끄럼틀을 함께 타는 등)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발달장애인을 향한 굳건한 신뢰와 충분한 기다림이 부모와 교사, 고용주, 정치인,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에 향수처럼 퍼져 나가야 한다. 금세 바람에 냄새가 흩어지는 향수가 아니라, 사방으로 고르게 오랫동안 향기가 퍼져 나가는 향수여야 한다. 이러한 향기가 가득한 사회 환경을 만들어내는 일이 필수적이다.


독립심은 단순히 학교에서 몇 년 배우거나 훈련한다고 해서 다져지는 게 아니다. 평생에 걸쳐 삶의 다방면에서 배우고 경험하고 훈련하며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야 하는 능력이다. 독립심이 향상되었을 때, 발달장애인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아직도 상상이 잘 안되는가? 그럼 독일을 보라. 독일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연재를 마칩니다.)


글, 사진=민세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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