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슈퍼마켓의 '고요한 시간'
<독일은 어때요?> 3화
"독일은 어때요?" 칼럼니스트 민세리가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독일에서 16년 넘게 거주하며 특수교육학자, 장애인복지전문가, 통번역가 그리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현재 박사과정에 있다. 이번 연재칼럼에서는 독일 발달장애인의 일과 삶에 대하여 생생한 현지 소식을 전달하고자 한다.
"마치 스무 대의 라디오에서 스무 개 방송이 동시에 흘러나오는 느낌이에요."
독일의 어느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이 자신의 일상을 묘사한 말이다. 그는 특히 슈퍼마켓 장 보기가 고역이라고 한다. 매장을 비추는 형형색색의 눈부신 조명, 쉬지 않고 울려 퍼지는 음악과 안내 방송, 수많은 쇼핑 카트의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과 사람들의 웅성거림, 끊임없이 '삑삑'거리는 계산대 스캔 소리 등이 그의 신경을 과도하게 자극하기 때문이다.
개인차가 있지만,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은 시청각 자극과 같은 외부 자극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또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편두통, 간질, 우울증, 다발성 경화증같이 각종 뇌신경계 질환을 가진 사람도 외부 자극에 과민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외부 자극에 과민 반응하는 사람들은 대형 슈퍼마켓처럼 감각 과부하 위험이 있는 장소를 피하려고 한다. 장 보는 일을 타인에게 맡기거나 인터넷 쇼핑을 더 선호하기 때문에 슈퍼마켓에서 직접 장 보는 능력을 기르기 힘들다. 혼자 장 보는 훈련을 하는 데 수 년이 걸리기도 한다. 하물며 슈퍼마켓에서 근무하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베를린의 한 슈퍼마켓 모습 © 민세리
이러한 이유로 독일은 '고요한 시간(Stille Stunde)'이라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2019년 뉴질랜드의 슈퍼마켓에서 최초로 시작된 '고요한 시간(quiet hour)' 캠페인은 영국과 스위스, 폴란드 등에 전파되었고, 독일은 2023년 캠페인 대열에 합류했다. 이 캠페인은 외부 자극에 민감한 자폐스펙트럼 장애와 기타 신경계 질환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배려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사회통합을 실현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주로 슈퍼마켓들이 캠페인에 참여한다.
'고요한 시간' 캠페인 홍보 자료 © gemeinsam zusammen e.V.
'고요한 시간'이 되면 슈퍼마켓은 매장 내 조명을 어둡게 하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안내방송을 끄고, 계산대 바코드 스캔 소리를 끄거나 최대한 낮추며, 고객들은 대화나 전화통화를 삼가고 매장 직원은 상품 진열 작업이나 기타 소음을 유발하는 작업을 잠시 중단한다.
'고요한 시간'이 실시되는 날짜와 시간은 슈퍼마켓마다 다르다. 예를 들어 월요일 오전 9시~10시, 화요일 오후 4시~5시처럼 일주일에 1시간씩 운영하거나 수요일 오후 6시~8시, 목요일 오후 2시~4시와 같이 일주일에 2시간씩 실시하는 식이다. 목요일 오후 5시~8시 같이 일주일에 무려 3시간 실시하거나 아예 일주일에 이틀간 2시간씩 실시하는 슈퍼마켓도 적지 않다.
독일 직장인의 퇴근시간이 보통 오후 4시~5시여서 하루 중 슈퍼마켓이 붐비기 시작하는 시간대가 오후 4시 이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간대에도 '고요한 시간'을 실시하는 슈퍼마켓이 있다니 참으로 인상적이다.
덕분에 자폐스펙트럼 장애나 신경계 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퇴근 후 혼자 힘으로 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자폐증 자녀를 둔 부모들도 퇴근 후 또는 하교 후 자녀와 함께 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자폐증 아동·청소년은 혼자서도 슈퍼마켓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외부 자극에 압도되어 슈퍼마켓에서 울거나 소리 지르는 일이 없이 말이다.
그뿐 아니라 비장애인 고객들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편안한 마음으로 장 보기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이유로, 슈퍼마켓 직원들은 “정신 없이 분주한 근무 패턴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고요한 시간'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고요한 시간'이 진행되는 어느 슈퍼마켓 모습(NDR Hallo Niedersachsen 방송 화면 캡처)
물론 대다수의 슈퍼마켓은 '고요한 시간' 도입에 아직 회의적이다. '고요한 시간'에는 어두운 조명 탓에 노인같이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장 보는 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며, 고객의 구매 욕구를 자극해야 할 시청각적 요소가 줄어들면 매출이 하락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캠페인에 동참하는 슈퍼마켓 수는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리고 '고요한 시간'에 매장 조명은 그대로 둔 채 매장 내 소음만 제거하는 등 슈퍼마켓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고요한 시간'이 진행되는 어느 슈퍼마켓 모습(SWR Landsschau Baden-Würtemberg 방송 화면 캡처)
현재 '고요한 시간' 캠페인에 참여 중인 슈퍼마켓은 독일 전역에 걸쳐 총 232곳이다. 이 중 절반가량은 CAP 슈퍼마켓이다. CAP은 직원의 약 50%가 장애인(대부분 발달장애인과 정신질환자)으로 구성된 사회적 기업이다. 1999년에 CAP 1호점을 오픈한 이후 현재 독일 전역에 총 108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CAP은 평범한 슈퍼마켓이다. 매장 규모, 제품군, 가격 등은 일반 할인마트 수준이고 직원들은 장애 유무를 떠나 최저임금이 적용되는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 CAP 직원들은 상품 진열하기, 매장 정리 정돈하기, 계산하기 같은 통상적인 마트 업무부터 배송서비스, 노인지원서비스(노인이 장을 볼 때 일대일로 동행하며 지원하는 서비스), 베이커리의 제빵 및 판매(마트 내에 베이커리가 있어 갓 구워낸 빵과 커피를 판매한다), 그리고 우편물취급서비스(마트 내에 우편물취급소가 설치되어 있다)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베를린에 있는 CAP 매장 내부 ©민세리
CAP은 조금 특별한 슈퍼마켓이기도 하다. 며칠 전 필자가 사진촬영을 위해 베를린 CAP 매장을 들렀을 때, 발달장애인으로 보이는 직원 4명이 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과일 코너에서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과일 상태를 체크하는 직원, 위생용품 코너에서 상품을 진열하는 데 한참을 헤매면서도 결국 혼자 힘으로 작업을 마무리하는 직원, 베이커리 코너에서 비장애인 직장 동료로부터 업무를 배우면서 실수를 반복하는 직원 그리고 계산대에서 밝은 미소로 느리지만 정성을 다해 상품 바코드를 스캔하는 직원이 있었다.
이들이 일하는 모습에서 한결같이 '느림'이 아니라 '여유'가 느껴졌다. '부족함'이 아니라 '가능성'이 보였다. 기계적으로 일하는 근로자가 아니라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일하는 근로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는 성인임이 분명했다. 누구나 마음 편히 일하고, 누구나 불편 없이 매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CAP와 같은 매장이 늘어난다면 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도 편안한, 그래서 모두가 행복한 사회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글, 사진= 민세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