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지평> 그 32년의 이야기
<열린지평> 신흥래 편집주간 인터뷰
'장애인과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가슴 뭉클한 소식을 전해온 열린지평이 이번 겨울 종간합니다. 1993년, 박연신 발행인(시조시인)이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에 의한 잡지를 만들고자 시작한 지 32년 만입니다. 흘러온 세월만큼 박 선생님의 건강이 여의치 않아 고민하던 끝에 스스로 판단하고 마무리할 수 있을 때 종간호를 내게 되었습니다. 열린지평은 끝이 나지만, 세상은 그가 바라던 대로 변화해 왔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그 뒤를 이을 것입니다. 푸르메재단 역시 그럴 테고요.
푸르메와 열린지평의 인연
푸르메재단 설립 소식을 처음 알린 2006년 겨울호(왼쪽)와 2024년 가을호에 실린 백경학·황혜경 부부
푸르메재단과 열린지평은 한뜻으로 서로를 응원해 왔습니다. 그 시작은 박연신 선생님입니다. 신문기사에서 백경학·황혜경 부부가 푸르메재단을 설립한다는 소식을 알고 한걸음에 달려가 2006년 겨울호 열린지평의 표지 인물로 소개했습니다. 이후 푸르메재단 기부 사진전에도 방문해 상당한 기금을 후원합니다. 백경학 대표는 열린지평의 평생구독 회원이 됐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박 선생님은 2012년 푸르메센터 건립에 위기를 맞은 재단에 5억 원을 후원했지요.
그 후 푸르메재단은 수백 명의 재단 기부자들에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열린지평을 보내며 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을 나눴습니다. 그리고 2024년 가을호 표지에 백경학·황혜경 부부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푸르메의 시작을 도왔던 열린지평이 마지막 순간 독자에게 푸르메를 다시 소개한 것은, 그 이후를 부탁하고 싶은 마음일까요?
종간을 앞둔 어느 날, 외출이 힘든 박연신 발행인 대신 신흥래 편집주간이 재단을 방문했습니다. 신 주간은 발행인과 열린지평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함께했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열린지평이 걸어온 길들,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리던 발행인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머니 마음’으로 사랑을 피우다
박연신 발행인, 장애인 기자와 함께
“박연신 선생님은 소신이 강하고 올곧은 분이셨어요. 언론사 인터뷰 요청도, 상을 받는 것도 다 거절하시고,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법도 없으셨어요. 머리도 화장도 하지 않고, 자주 드셨던 음식도 중·고등학생들이 다니는 분식집의 떡만두국이나 채소김밥 정도였죠. 그러면서도 장애인들에게는 아낌없이 베푸셨어요. 그들을 기자나 리포터로 일하게 해 월급과 원고료를 주고, 휠체어 장애인들이 취재를 다닐 수 있게 봉고차도 개조해 운행했어요. 장애인 전용 승합차가 나오기도 전 일이었어요. 기존의 비좁은 사무실엔 가파른 계단밖에 없어서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의 2층을 따로 얻어 장애인 기자들을 위한 업무 공간을 마련해주셨어요.”
박 선생님에게는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첫째가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시외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용하다는 데는 다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장애 인식’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에 ‘장애는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을지 감히 상상하기 힘듭니다.
푸르메센터 1층에 전시된 손영선 화백의 그림 앞에 선 신흥래 편집주간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아이의 재능을 찾아 결국 국내를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는 화가 ‘손영선’ 씨를 키워냈습니다. 그 경험은 고스란히 열린지평의 토대가 됐습니다. “조기재활과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장애인들이 재능을 키워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셨지요.”
열린지평이 닦아온 길
푸르메센터 건립을 도운 것도 그랬지만 열린지평은 장애인을 돕는 일에 늘 앞장섰습니다. 언론을 통해, 혹은 주변에서 형편이 어려운 장애인들의 소식을 접하면 달려가서 도왔습니다.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희아’ 씨를 비롯한 많은 장애인과 가족에게는 생활비와 격려금을, 공부하고 싶다는 장애학생들에게는 졸업할 때까지 교육비를 지원했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 직접 찾아가 장애인들을 도왔습니다. 한마디로 ‘어머니의 마음’ 그대로 안아주고 다독여주고 행복을 나누었습니다.
안국동로터리 육교 철거 전(위)과 후
사회의 큰 변화를 이끈 사건도 있습니다. 1990년대에는 시내 어디서도 장애인을 보기 힘든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의 시선도 따가웠지만, 육교와 지하도가 많아 휠체어 타고 다니기가 쉽지 않았죠. 심지어 장애인고용공단이 있던 안국동로터리에도 횡단보도 없이 육교만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자주 방문해야 하는 곳에 육교가 버티고 있으니 장애인들이 다니기 힘들었지요. 그래서 저희가 서울시와 종로구청에 이의를 제기하고 수시로 민원을 넣었어요. 20년간 열린지평 리포터로 일한 박종태 기자가 몇 번씩 쫓아가서 항의하기도 했죠. 결국 2001년에 육교가 철거됐어요.”
이를 계기로 서울시는 시 전역의 육교를 하나씩 철거하기 시작합니다. 시내 도로가 보행자 우선정책으로 바뀌게 된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장애인만이 아니라 시민 모두에게 기쁜 일이었습니다.
꽃을 바치는 마음으로
“선생님은 꽃을 참 좋아하셨어요. 열린지평의 존재 의미도 종종 꽃에 비유하셨죠.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 석으로 아버지 눈을 뜨게 했듯이 꽃을 바치는 ‘공양화 정신’으로 장애인이 재능을 살려 나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요. 그런 의미에서 요즘 ‘나답게’ ‘꽃을 피우는’ 장애인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낍니다.”
무수히 많은 장애인 기자와 리포터가 열린지평을 거쳐 갔습니다. 그들 중 다수가 장애인 단체와 기관, 언론 등에서 자신과 같은 장애인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열린지평과 여전히 끈을 잇고 있는 이들도 있고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일하며 20여 년간 열린지평에 글을 연재하고 있는 박종태 기자는 “엄격하셨던 박연신 편집장님(창간 때 직함)이 장애인 기자들에게는 참 크고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주셨다”고 추억합니다. “형편이 넉넉하신데도 검소한 차림으로 온갖 데 책을 팔러 다니셨어요. 자신에게 쓸 돈을 모두 장애인을 돕는 데 쓰셨죠. 그렇게 이어온 열린지평이 종간한다고 하니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2000년대 초반 기자로 활동했던 오성환 노원중증장애인독립생활센터 대표는 “열린지평은 장애인이 삶의 애환을 전달할 수 있는 창구”였다며 “목소리를 낼 매체가 하나 사라졌다는 것이 슬프다”고 얘기합니다.
창간호부터 최근 호까지 걸려 있는 열린지평 사무실에서
열린지평은 이제 오는 12월 5일 고별호 발행만이 남았습니다. “열린지평은 언제나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장애인들과 함께했어요.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머니라면 어떻게 했을까’부터 생각하고 결정했지요. 말 그대로 온몸을 불태워 세상을 밝혔어요. 비록 우리의 발걸음은 여기서 그치지만 언제 어디서나 푸르메재단을 응원하겠습니다.”
*글= 지화정 과장 (마케팅팀)
*사진= 열린지평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