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자립을 향한 첫 발

<발달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8화


 



칼럼니스트 김유리는 평범한 직장인이자,  에세이 <너와 함께라면>을 쓴 발달장애인 작가이다. 말보다 글이 편하다고 말하는 천생 글쟁이다. 칼럼의 주제에서 '자립'이라 함은 '남에게 의지하거나 매어있지 않고 스스로 섬'을 의미하는 것으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늘려갔던 경험들을 들려줄 계획이다. 그 안에서 발달장애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를 함께 다루며 장애 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내보기로 했다.



지난 초여름, 친구와 함께 걷기 운동을 했다. 4월부터 걷기와 달리기를 병행하고 있는 친구의 권유에서다. 가산디지털단지 역 근처 안양천 길을 따라 구일역까지 걸었다. 2km 남짓한 거리였다. 내가 2km나 되는 거리를 지치지도 않고 한 번에 걸었다는 사실에 성취감이 생겼다. 그 다음날부터 집 근처 한강공원에서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한 번에 3km로도 걷고, 그 다음날은 욕심을 내서 5km를 걸었다.


처음에는 권유받아 시작했지만, 지금은 내가 좋아서 한다. 공원에서 걷거나 뛰는 사람들 틈에서 함께 걷고, 뛰다 보면 나도 잘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을 시작하던 시기에는 이른 저녁을 먹고 오후 6시쯤 나가면 해가 질 무렵에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2주일쯤 지났을까? 낮 기온이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시작되었고, 오후 6시에도 운동을 하기가 힘든 날씨가 되었다.


친구가 한낮 더위를 피해 해가 지고 난 다음에 운동을 시작하는 걸 런데이라는 어플을 통해 보면서도 나는 밤에는 운동을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어두운 데서 운동하면 위험하니까 집에서 실내자전거를 타면 좋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외운동의 매력을 맛봐서인지 실내자전거 타기가 지루해졌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그렇게 운동을 하지 않은지 3주차가 되던 날, 친구와 밤에 공원을 걸었다. 친구와 2번 정도 밤에 공원을 걷고 나니,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원불빛은 환했고 밤에도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늦은 저녁시간에도 밖으로 나와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부모님께서 하지 말라고 했다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어제 저녁에 친구와 공원을 걷고 왔는데,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선 저녁에 운동하고 오겠다고 말씀드렸다. 1시간 이내로 돌아오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엄마는 3주 전과 달리 “그래, 요즘엔 밤에 사람들이 많더라”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금세 다른 화제로 돌리시는 것 보니 내가 밤에 운동을 나가는 것을 여전히 염려스러워하시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단념하고 싶지 않았다. 내년에는 친구와 단축 마라톤 대회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낮에도 날씨가 선선해지기 기다렸다가는 지금까지 쌓아온 체력이 처음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요즘은 저녁 7시는 물론, 8시에도 공원에 나가서 3~5km씩 걷거나 달리는 운동을 하고 온다. 사고가 나진 않을까 걱정하시던 부모님께서는 이제는 열심히 해보라며 응원을 해 주신다.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시간이 1분에서 1분 30초가 되었을 때, 운동할 때, 매고 하던 핸드폰을 넣은 크로스백 가방이 거추장스럽다고 느껴졌다. 며칠간 인터넷 검색하고 고민한 끝에 온라인으로 러닝 벨트를 구매했다. 20대 후반만 해도 부모님께서 “너한테 필요 없을 것 같은데”라고 말씀하시면 아무리 필요하고 갖고 싶어도 참았다. 예전 같았으면 엄마한테 사도 되냐고 물어보고 샀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신 다음 달 카드값은 내 책임이 되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내가 갖고 싶은 거 모두 샀는데, 요즘은 내게 지금 그 물건이 반드시 필요한지 며칠 동안 생각해보고, 여러 제품을 비교해 보며 산다.


친구게게 러닝벨트를 샀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보다 먼저 사야 할 건 러닝화라고 말했다. 러닝화를 샀는데 아주 가볍고 푹신하다고 했다. 가격이 저렴한 러닝화여도 운동화보다는 훨씬 좋다는 친구의 말에도 신발을 사는 것이 망설여졌다. 신발과 옷은 혼자 구매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숨이 별로 차지 않고 한 번에 달릴 수 있는 시간이 2분 30초가 되었다. 신던 운동화가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발이 아팠다. 그제야 이제는 러닝화 사는 걸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러닝화를 사야 되는데, 어디서 사면 좋을까요?”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부모님이 ‘요 앞에 신발가게에 가볼까?’라고 하시면, ‘네 좋아요. 가요.’라고 말하는 게 나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집 근처 신발 전문매장에서 러닝화도 판다는 사실만 알려 주셨다. 요즘 부쩍 체력이 약해진 부모님께 필수품도 아닌 취미용품 사는데 동행해 달라고 말하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이후 신발에 대해서 많이 알아보았다. 신발매장에서 신발을 고르는 법, 내가 평소에 신는 신발 사이즈를 직원에게 요청하는 법, 매장에서 신발을 신어보는 방법, 사이즈가 안 맞을 때, 교환이나, 환불받는 방법까지 알아냈다. 실패할까봐 두렵긴 했지만 이대로 멈추면 안 되었다. 이 기회 아니면 신발을 살 때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것 같았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추석 연휴, 아빠가 추천해 주신 집 근처 신발매장에 혼자 다녀왔다. 직원에게 러닝화가 어느 쪽에 진열되어 있는지 묻고, 꼼꼼히 살펴보았다. 마음에 드는 신발 몇 개를 신어보았다. 이전 같았으면 엄마께 내가 신을 신발 디자인의 선택권을 넘겼을 것이다. 신발뿐만 아니라, 옷 디자인도 내가 스스로 선택하기 어려웠다. 10년 전에, 혼자서 티셔츠를 구매하러 간 적이 있었다. 매장에서 볼 때는 괜찮았는데, 집에 와서 입어 보니까 티셔츠에 달린 주머니가 삐뚤어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택을 떼어버린 뒤였고, 영수증도 없는 상황이라 환불할 수도 없어, 외출복으로 산 옷을 잠옷으로 입었던 기억이 난다. 이때부터 난 내게 어울리는 옷을 잘 못 고른다고 생각해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매장에서 러닝화를 세 컬레 신어봤는데 이 중에 가장 편하고 디자인이 마음에 드는 신발을 골랐다. 할인쿠폰을 쓰는 일도 잊지 않았다.


처음으로 혼자 산 신발처음으로 혼자 산 신발


신발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동안 나는 신발을 혼자 사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아서였다. 내게 맞지 않은 신발을 고를까 봐서이기도 했고, 점원이 나를 장애인인 걸 알고 덤터기를 씌우는 건 아닐까 하는 자격지심도 있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내 발에 아주 편한 신발을 골랐고, 할인까지 받아서 잘 샀다.


부모님께 신발을 샀다고 말씀드리니, “잘했네” 하시며 나의 성장에 기뻐하셨다. 신발 디자인을 혼자 골랐냐는 물음에 나는 “네, 제가 마음에 드는 디자인으로 골랐어요.” 라고 대답했다.


이제는 가을과 겨울에 달리기할 때 입을 운동복 구매에 도전해 보려 한다. 어떤 계기에서인지 어릴 때부터 외우고 다녔던 신발사이즈와 달리 옷 사이즈는 잘 알지 못한다. 옷 사이즈부터 알아야 하기에 신발을 사는 것보다 난이도가 높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왜냐하면 옷을 사는데 실패를 경험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옷 사이즈나 디자인을 잘못 골라 매장에 찾아가 환불이나 교환을 받기도 한다.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옷과 신발을 혼자서 사보는 일에 익숙해진다면 홀로 서는 일에 한 발짝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어 온다.


*글= 김유리 작가
*사진= 김유리 작가,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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