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농부의 기부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 황보태조 기부자 1편


 


스위스 장크트갈렌 수도원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760년 양피지 필사본을 시작으로 천년이 넘은 희귀본 등 모두 17만 권의 책이 소장돼 있습니다. 바로크풍의 아름다운 천장 벽화와 호두나무로 만든 서가로 이루어진 도서관 문설주 위에는 ‘영혼의 치유소(PSYCHES IATREION, Healing Place of Soul)’라는 황금문패가 걸려있습니다. BC 13세기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 2세가 만든 신전 내 파피루스를 보관하던 성스러운 장소를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카타이오스가 ‘영혼의 요양소’라고 표기하면서 도서관의 명칭이 된 것이지요. 미국 워싱턴에 있는 의회도서관에는 ‘책을 껴안고 있는 로마 여인의 벽화’가 있습니다. 옆에는 ‘책, 영혼의 기쁨이여’란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책을 통해 얻게 되는 지혜와 깨달음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논어(論語)에서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며 배우는 기쁨을 표현합니다.


저서 ‘가슴 높이로 공을 던져라’ 인세를 기부한 황보태조 기부자


벌써 10년도 훌쩍 지난 일입니다. 연세 지긋한 분이 재단을 찾아오셨습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당신을 ‘포항 구룡포에서 농사짓는 황보태조’라고 소개했습니다. 책을 냈는데, 그 인세를 기부하고 싶다고 했지요. ‘농부가 무슨 책을 쓰셨을까?’하고 궁금해할 무렵, 황보태조 선생님은 “부끄럽지만 2000만 원을 기부하고 싶습니다”라며 수줍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저는 지난 40년 동안 포항 인근 산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빚을 많이 졌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지난해 빚을 모두 갚게 됐습니다.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까 생각하다가 푸르메재단을 발견했습니다. 어린이에게 작은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황보태조 선생님은 서울에 올라오면 구기동 아들 집에 묵는데 서울역에서 구기동으로 가는 버스가 언제나 푸르메재단 건물 앞을 지나간다고 합니다. 무슨 단체인가 궁금해하다 장애어린이의 재활치료를 돕는다는 것을 아시고 기부를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많은 분이 인세 기부를 약속했지만 실제로 성사된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농사짓는 농부가 평생 진 빚을 갚게 된 것에 감사해 기부하시겠다니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물었습니다. 1946년생이신 황보태조 선생님은 당신이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천붕(天崩)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이라는 뜻이지요.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손자와 며느리를 붙잡고 죽은 아들을 원망했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지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붙잡고 물어볼 곳도 없었습니다. 학교도, 선생님도 무서웠습니다. 어린시절을 생각하면 어두운 골목을 한없이 맴도는 것 같았습니다.” 황보태조 선생님은 다니던 대구의 한 고등학교를 1학년 때 자퇴했습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아이들의 어린 시절


무작정 상경한 황보태조 선생님은 우유배달과 노동판에 뛰어들었습니다. 서울에 아무 연고가 없는 지방청년에게 서울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교회에서 부인을 만나 결혼하면서 생활이 안정되자 작은 구멍가게(점방)를 차렸습니다. 아이들이 연년생으로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일했지만 서울에서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황보태조 선생님은 봉천동 산동네를 떠나 고향 구룡포로 내려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낙향을 결심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하나 있었습니다. 부부가 늘 점방에서 손님을 맞이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방안에 갇혀 지내야 했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며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때 어두웠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황보 선생님은 아이들을 더는 어두운 골방에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상하고 경제력 있는 가장이 되어야 했습니다.


구룡포 외곽 비탈진 500평에 마늘을 심었습니다. 다행히 작황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몇 해 뒤에는 수익성 좋다는 수박을 심었습니다. 수박을 키우기 위해선 물이 필요했습니다. 시행착오를 거쳐 가는 호스로 물을 산비탈까지 끌어 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수박 모종을 심고 수분이 증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땅에 비닐을 씌웠습니다. 여름이 되자 꿈이 영글 듯 수박이 크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수박 농사는 대풍이었습니다. 마늘과 수박 번 돈을 모아 땅 1000평을 샀습니다. 처음 갖게 된 내 소유의 땅이었습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1000평의 땅에서 어떻게 높은 소득을 올릴까 하고 청년 농부는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마침내 선택한 것이 완숙 토마토였습니다.


(2편에 계속)


 


*글, 사진= 백경학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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