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모임 총무, 피하고 싶지만 해야 하는 이유

<발달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4화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급반장이 되었다. 반장으로 뽑힌 이유는 물론, 반장이 돼서 어떤 일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반장으로 뽑혀서 너무 좋았던 나머지 활짝 웃었던 것만은 선명하다. 오래된 기억이 잊히지 않은 이유는 내가 빙그레 웃으며 반장이 된 소감을 발표하자, 부반장이 된 친구가 이를 오해했던 기억 때문이다. 그 친구는 내가 자신을 보며 비웃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장이 된 아이들은, 반장이 되었다며 좋아하고, 반장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그들을 질투하고… 그러다 싸움이 일어날 정도로, 어린 시절 학급반장이라는 자리는 세상 전부를 가진 듯했다. 왕이 된 기분이랄까? 아직 어떤 일을 책임감을 가지고 맡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몰라서 나와 친구들은 그 자리를 더 탐냈는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된 지금은 모임에서 웬만하면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고 싶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아주 조용히 자리만 지키다 그 자리를 뜨고 싶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인데, 모임 총무라도 맡을라치면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성원에게 의견 물어보기’, ‘모임장소와 식당 알아보고 예약하기’, ‘회비관리’ 등, 역할분담이 잘 되지 않는 모임의 경우엔 모두 총무 차지가 된다.


나는 A 모임에서는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고 싶다’는 바람대로 지내고 있다. 총무가 알아본 장소와 맛집에 ‘네, 좋아요’라고만 대답하고, 더 이상 나서지 않는다. 그냥 따라만 다닌다. 그러다 보니 몸이 편하다. 신경 쓸 일이 전혀 없이 참여만 하면 된다. 다만 앵무새처럼 ‘네, 좋아요’만 하다 보니,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은 거의 먹지 못한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B 모임은 총무가 따로 없다. 총무가 해야 할 일을 각자 2~3개씩 맡았다. 나는 길 찾기와 카드 결제, 회비 입금, 출금 내역 작성을 맡았다. 모임원 모두가 역할을 맡다 보니 그 일을 누가 한 명이라도 펑크를 내면 모임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게 된다. 모임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지 않으려야 안 생길 수가 없다.


“우리 다음 달에는 망원동 투어 하기로 했죠? 제가 망원동에 오래 살았잖아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안내할게요.”


벌써 지난해 가을경의 일이다. 모임원들에게 멋지게 가이드 역할을 한 이후, 1년 전부터 가기로 했던 1박 2일 정선 여행계획을 내 손으로 직접 세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망원동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니 자신감이 붙었기 때문이다. B 모임원들은 최근 들어 적극적으로 나서는 나를 보고 많이 놀랐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A 모임에서처럼 ‘나 하나 없어도 잘 굴러가겠지’라는 생각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냈기 때문이다. A 모임에서는 아직 모른다. B모임에서 내 주도 아래 꼼꼼히 세운 계획으로 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부터 비용 지원까지 받아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요즘은 바쁜 일정으로 A 모임에 잘 참석하지 못하지만 참석하게 되면 이렇게 이야기할 거다.


“저, 제가 세운 여행계획으로 B 모임에서 여행 다녀왔어요. 글램핑 캠핑도 하고, 짚와이어도 탔어요.”



A 모임 구성원들은 아마도 변화된 내 모습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A 모임에서는 적극적인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네가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지 몰랐어, 왜 우리 모임에서는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어?’라며 놀라움과 동시에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다.


반면 얼마 전까지 참여했던 C 모임은 모임원 거의 대다수가 발달장애인이었다. 지난 2년간 내가 모임 총무를 맡았다. 해가 바뀌었는데도, ‘새로운 총무 뽑아야죠. 총무 맡고 싶으신 분?’ 이라고 묻지도 않았다. 총무 자리를 넘겨주고 다른 일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적임자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님이 올해에는 자신이 총무를 해보고 싶다고 하셔서 총무 자리를 넘겨주었다. 경험이 없다고 하셔서 모임을 잘 이끌어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내가 몇 년이고 모임을 독재할 수가 없었다. 그건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C 모임에서 총무 맡을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건방진 생각이었다. ○○님은 총무 역할을 무척 잘했다. 가족여행으로 모임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하지 못하던 때였다. 내가 참석하지 못한다고 하자, 자신의 방법대로 회원들에게 어디 갈 건지 묻고, 맛집을 검색하고, 투표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았다. 모임 전날까지도 어디서 만날지, 무얼 먹을 건지, 어떤 활동을 할 건지 결정이 되지 않은 모습을 보며 그의 방법대로 진행해도 제날짜에 모임을 할 수 있을지 염려스러웠다. 여행지에서 단톡방을 확인했을 때 모임 사진이 올라온 걸 보면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모임 진행에 꼭 정답이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A 모임에서 따라만 다니는 나’, ‘B 모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나’, 그리고 ‘C 모임에서 총무자리를 넘겨주니 자신의 방법대로 모임 진행을 잘 하는 ○○ 님’을 보면서 깨달았다. 발달장애인일수록 나서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이런 걸 잘 할 수 있다고 말하고, 나에게도 기회를 달라, 조금만 기다려주고 옆에서 거들어주면 할 수 있다 라며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모임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으면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모임 운영을 위한 작은 일 하나라도 맡아보기를 권한다. B 모임에서 가이드 역할을 하고, 여행계획도 직접 세우며, 모임을 주도함으로써 모임원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 라는 걸 몸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느낌도 받아서 삶에 활력이 생겼다.



모임에서 ‘발달장애인이라 총무 일 못해, 시키면 안 돼’가 아닌,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모임에서 총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해, 그런데 총무를 맡고 싶지 않다고 하네,’ 라는 인식이 퍼질 때까지는 전국에 25만여 명의 발달장애 당사자들이여, 우리 열심히 움직입시다!!


*글= 김유리 작가
*사진=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 AI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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