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나팔꽃 아버지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정호승 시인 2편


 


정호승 시인의 시 <이별 노래>는 1984년 가수 이동원에 의해 노래로 불리어 큰 인기를 얻었다. 1991년에는 <부치지 않은 편지>가 김광석에 의해 불리면서 정호승 시인의 시가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시가 본격적으로 노래가 된 것은 전두환 신군부에 노래로 저항했던 민중가수 안치환 덕분이었다. <봄길>, <강변역에서>, <나팔꽃> 등 애송되는 정호승의 시 80여 편이 안치환에 의해 노래가 됐다. 1993년 한 출판사가 설악산에 독자들을 위해 캠프를 마련했다. 안치환은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불렀고 이 자리에 정호승 시인이 초대됐다. 안치환을 처음 만난 정호승 시인은 감동했다.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자 이때부터 노래가 쏟아져 나왔다.


정호승 시인(사진 오른쪽)과 안치환 가수정호승 시인(사진 오른쪽)과 안치환 가수


보통 글 쓰는 직업인 작가, 기자, 학자 중 원고지 10~20매를 한 시간 안에 쓸 정도로 속필인 사람이 있고 원고지 한두 장을 채우기 위해 며칠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장르는 비록 다르지만 작곡가 슈베르트는 영감이 떠오르면 미친 듯이 써 내려가 한순간에 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괴테의 시 <마왕>을 읽고 노래로 작곡하는데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셰익스피어 시에 곡을 붙인 <들어라, 종달새여>는 맥줏집에서 친구가 읽던 시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슈베르트는 31년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600곡이 넘는 가곡을 남겼다. 반면 베토벤은 <전원 교향곡>과 <운명 교향곡>을 구상하고 완성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고 한다. 초고를 쓴 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완성하는 것이 베토벤 스타일이다.


정호승 시인은 어떨까? “저는 보통 초고를 쓰면 30번 정도 다듬는 스타일입니다. 어떤 시는 10년 걸려 완성했습니다. 원고지에 고치다 보면 더 이상 고쳐 쓸 여백이 없기 때문에 아예 A4용지에 출력해서 기회가 날 때마다 수정한 뒤 다시 출력하곤 합니다.”


소설가 고 박경리 선생의 따님 김영주 여사의 인터뷰가 기억난다. 잠을 자다 한밤중에 깨어보면 어머니가 낮에 쓴 소설 원고를 고치고 있었고, 자다 또 깨어나면 또 고치고 있는 모습을 봤다고 한다. 원고지가 새까맣게 될 때까지 지겹게 수정하는 것을 보고 자신은 절대 소설가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처럼 정호승 시인의 시도 쉽게 쓴 것인 줄 알았는데 이처럼 오랜 시간 고통이 뒤따른다는 걸 알았다.


<수선화에게> 시비 앞에 선 정호승 시인<수선화에게> 시비 앞에 선 정호승 시인


정호승 시인에게 시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시를 써서 큰돈을 벌 수도 없고 명예나 권력을 좇을 수도 없습니다.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하고 권력을 잡으려면 정치를 해야겠지요. 하지만 시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를 쓰다 보면 스스로 위안을 받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시인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어린이와 같이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시입니다. 제가 쓴 시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의 내용 중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을 쓰면서 저 스스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까요. 인생이 때론 냉정하다 못해 냉혹할지라도 원망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원망할 대상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울까요. 생각을 바꾸었더니 인생이 그동안 나에게 많은 술을 사준 셈이 된 거지요.”


정호승 시인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그분들의 아파트를 작업실로 삼았다. 매일 아침 부모님 댁 건넌방으로 출근해 저녁이 되면 퇴근하곤 했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매일 출근하는 자식을 보고 좋아하셨다고 한다. 당신 역시 글도 쓰고 부모님을 뵙는 것이 적잖은 기쁨이었다고 한다.


이금희 방송인(왼쪽 두 번째), 이지선 교수(맨 오른쪽)와 함께이금희 방송인(왼쪽 두 번째), 이지선 교수(맨 오른쪽)와 함께


어느 날 아버지가 식탁에 놓인 나팔꽃 씨를 태연하게 입에 털어 넣으셨다. 정호승 선생님이 화들짝 놀라 말리자 ‘환약인 줄 알고 먹었다’며 환하게 아버지가 웃으셨다. 그때 아버지가 한 송이 나팔꽃처럼 보였다. “노인이 되면 누구나 장애인이 되는 것이지요. 절망적으로 보이는 장애도 관점을 바꾸면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하고 그가 말했다. 노환으로 시력을 잃게 된 아버지와 이를 시로 쓴 아들의 이야기가 나팔꽃에 담겨있다.


<나팔꽃>


한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푸르메재단의 열혈후원자인 정호승 시인은 매년 재단 행사에 함께해 주셨다. 백두산으로 떠난 여행에는 발달장애 초등학생과 단짝이 되어 3박 4일 동안 함께 생활하셨다. 단짝인 꼬마가 같은 내용을 물으면 화가 날 만도 한데 웃는 표정으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대답해 주시는 것을 보고 함께 여행한 사람들이 감동받았다. 백두산 정상과 북한 병사가 보이는 판문점 앞에서 평화를 기원하며 당신의 시를 낭독하셨다.


<푸르메를 사랑한 작가 초대전>에서 인사말을 하는 정호승 시인<푸르메를 사랑한 작가 초대전>에서 인사말을 하는 정호승 시인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2016년 <푸르메를 사랑한 작가 초대전>이었다. 국내 최초의 통합형 어린이재활병원인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의 개원 행사로 고 박완서, 정호승, 이해인 세 분의 원고와 애장품 등을 전시했다. 푸르메재단에 인세를 보내주시고 아낌없이 사랑해주신 세 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정호승 시인은 장애 자녀를 둔 부모님을 위한 시낭송회도 열어 눈물바다를 만들었다. 책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면 사무실에 오셔서 수북이 쌓인 당신의 시집에 정성스럽게 사인해주신다. 선생님의 얼굴이 나팔꽃처럼 때론 수선화처럼 환하다.


화향백리(花香百里) 주향천리(酒香千里)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말이 있다. 꽃향기는 백 리를 가고, 술향기는 천 리를 가지만 사람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는 뜻이다.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고 향기 나는 사람이 있다면 큰 행운이다. 내게 그런 분이 정호승 시인이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갚을지 고민이다.


*글, 사진= 백경학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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