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나의 학창시절은
<발달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2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추억한다. 하지만 내 학창시절만은 과거로 갈수록 괴로웠던 기억뿐이다. 유치원 시절보다 초등학생 때가 좋았고, 초등학생 시절보다 중·고등학생 때가 좋았다고 하면 믿을까?
7살 때의 기억은 거의 흐릿해졌지만, 유치원에서 밥 먹다 말고 6살 동생들 반으로 쫓겨났던 기억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밥을 먹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너 누구야”, “왜 우리 반에 와서 밥 먹어?”라고 묻는 동생들 앞에서 밥을 마저 먹는데, 정말이지 수치스러웠다. 오죽했으면 초등학교 입학 후 우유급식을 할 때 담임선생님께서 반 친구들에게 나를 보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쫓겨나는 것보다 더 좋았을까?
“유리는 몸이 아파서 우유 먹을 때 빨대로 먹는 거란다. 너희는 빨대로 먹으면 안 된다.”
나를 아픈 아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어릴 때도 잔병치레 없이 너무나도 건강했던 나는 위 문장 하나 쓰는데 얼마나 민망하면 몸이 배배 꼬일 정도다. 그럼에도 당시에는 저 말이 싫지 않았다. 유치원 다닐 때는 밥 먹다 쫓겨나기도 하며 느리고 답답하고 이상한 애 취급을 받았는데, 초등학생이 되니 이상한 아이에서 벗어났다. 반에서 쫓겨나지도 않았다. 졸지에 아픈 아이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나만 빨대로 우유를 먹은 지 얼마 후, 빨대를 안 가지고 온 바람에 우유를 그냥 마시기 시도! 친구들 앞에서 우유를 턱 밑까지 질질 흘리는 창피한 경험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빨대 없이도 잘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내겐 악몽 같았던 유치원 시절과는 달리 선생님의 따스한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내 초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4학년 때 학급반장을 맡았던 기억도 있으니, 이때까지는 비장애 친구들과 학습과 발달 면에서 별 차이 없이 잘 어울려 지낸 듯하다. 그럼에도 초등학교 때보다 중·고등학교 시절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5학년 때부터 시작된 반 친구들의 괴롭힘 때문이다.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친구들도 조금씩 알아챈 모양이다. 내가 자신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많은 발달장애인들이 학창시절에 학교폭력을 당했던 경험이 있다고 한다. 으슥한 골목길로 끌러가서 이유 없이 두들겨 맞기도 하고 화장실에 감금당하기도 했다는데, 나는 맞거나 감금당한 기억은 없다. 다만 ‘바보’, ‘애자’ ‘기형아’라고 놀림을 받고, 수업시간에 등을 볼펜으로 찔리고, 내 책상 서랍이 쓰레기통이 되는 등의 괴롭힘을 겪었다.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느리고, 공부를 잘 못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보다 더한 학교폭력 사례를 자주 접한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당한 학교폭력은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폭력을 당했다고 쓰기에도 민망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오랜 시간이 흘러 나쁜 기억이 흐릿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만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때 나는 자살 충동이 들 만큼 괴로웠다.
출처 : 픽사베이
얼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고 싶었다. 내가 배정받은 학교에는 특수학급이 있다고 했다. 졸업식 날 선생님께서는 엄마에게 중학교에는 특수학급이 있으니 유리가 더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특수학급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다. 특수학급 있는 것이 왜 학교생활을 편하게 한다는 건지도 몰랐다. 다만 나를 괴롭히는 친구들과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원반과 학습도움실이라는 이름의 특수학급을 왔다 갔다 했다. 입학 초기에는 내가 왜 수학, 영어시간마다 내 교실에 있지 않고 다른 교실에서 수업을 받아야 할까?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원반에서만 수업을 받고 싶었다. 특수학급 선생님께서는 장애 진단을 받고 힘들어하는 내 마음을 꿰뚫어 보셨는지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인간은 자기의 뇌 10%도 쓰지 못한단다. 유리는 지금 머리 일부분이 아프지만 나머지 90%의 뇌 기능을 잘 활용하면 된단다.” 지금은 장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람의 두뇌는 모든 부분을 사용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선생님께서는 장애를 가졌어도 얼마든지 내 꿈을 펼칠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중학교 입학 후, 처음 몇 달간만 특수학급 학생이라는 사실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이후에는 잘 다녔다. 중학생이 되어 처음 접한 특수학급은 나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그렇다고 친구들의 따돌림을 받지 않게 되는 건 아니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책상에 앉아 있는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초등학생 때처럼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의 괴롭힘은 없었다. 특수학급 학생들을 괴롭히면 원반 담임선생님을 통해 바로 특수학급 선생님 귀에 들어갔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 특수학급 선생님은 학생주임이셨다. 무섭기로 소문난 학생주임 선생님께 혼날 걱정에 특수학급 학생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장애인은 아픈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시기는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였다. 고등학교에도 특수학급이 있었는데, 중학교와 달리 1~3학년을 합쳐 3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특수교육을 받았다. 장애 진단은 받지 않았지만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도 특수학급을 이용할 수 있었던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 특수학급에는 장애 등록을 받은 학생들만 있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나는, 우리는 아픈 사람이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 말을 들으신 특수학급 선생님께서 장애는 병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셨다. 2004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답을 들은 것이다.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장애는 질병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 고등학교 생활은 어땠을까? 어려운 과목 시간에 개별수업 받았던 중학교와 달리 단체로 수업을 받았다. 학년별, 전체학년별 수업시간표가 짜여 있었다. 평소에는 원반에서 비장애인 학생들과 통합수업을 받다가 특수학급 시간표대로 움직였다. 특수학급에서는 댄스 수업도 받고, 미디어 수업도 받았다. 국어 수업도 받았는데, 'TV동화 행복한 세상'이라는 책으로 수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한 달에 한 번은 현장 체험 학습을 다녔는데 서울대공원에도 가고, 북한산에도 가고, 제주도에도 다녀왔다. 3학년 때는, 1주일에 한 번씩 학교와 가까운 장애인복지관에 방문해서 부품을 조립했다. 단순 작업이 아닌, 바리스타나 제과제빵 등 전문적인 직업과 연관된 수업도 받았으면 어땠을까 싶은데, 현재는 특수학급에서 이러한 것들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출처: 픽사베이
고등학교에서도 원반에서 비장애인 친구들과 지낼 때 수학여행을 가고 싶지 않다고 하는 등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초등학교나 유치원에 다녔을 때보다는 편했다. 만일 내가 장애아를 전담하는 유치원에 다녔더라면, 다른 친구들보다 느리다는 구박 없이 지내지 않았을까? 6살 동생들이 있는 반에서 밥을 먹는 일은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도 특수학급이 있었다면 친구들이 놀리고 괴롭힘을 당해 마음이 힘들 때마다, 특수학급으로 피신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중·고등학교에서도 특수학급이 아닌 원반에서는 외로웠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보다는 좋았다. 내 장애를 잘 이해해 주시는 특수 교사 분들이 교내에 계셨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모든 유치원, 초등학교에도 특수학급이 생겼으면 좋겠다. 현재 장애어린이들이 어른이 되어 과거를 회상할 때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 수 있는 꼬맹이 시절이 좋았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도록.
*글= 김유리 작가
*사진= 김유리 작가, 픽사베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