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정호승 시인 1편
서가에서 오래된 책을 한 권 꺼내 들었다. 1982년 출간된 정호승 선생님의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 누렇게 바랜 표지를 들추니 안쪽에 ‘목마른 시절 1985년 5월 29일’이라고 적혀 있다. 힘든 고개를 넘던 시절, 정호승 선생님의 시를 통해 적지 않은 위안을 받았다. 책 표지를 넘기니 금테안경 너머로 날카롭게 세상을 쏘아보는 청년 정호승이 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부드러운 말씨의 선생님이 이럴 때도 있었구나.
정호승 선생님의 두 번째 시집 <서울의 예수>
20대의 정호승을 보고 있자니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서 크리스티의 일화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 읽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책 표지 안쪽에는 검은 정장을 입고 손으로 턱을 받친 사진이 있었다. 젊거나 늙지도 않고, 웃거나 화내지 않은 무심한 표정이었다. 1976년 크리스티가 86세로 타계했을 때 <선데이 타임스>는 40살 때 찍은 그 사진만을 사용하도록 그녀가 부탁했다고 보도했다. 70대 정호승 선생님도 세상을 쏘아보는 듯한 20대 사진만을 고집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수선화에게>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 같은 서정적인 시는 나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시집 <서울의 예수>에 들어있는 시들은 젊은 날의 정호승처럼 시대적인 상황이 반영돼 어둡고 뾰족하다. 시가 슬픔 속에 잠겨있다.
<가고파>
봄날에 죽은 나라 눈물의 나라
봄눈이 오기 전에 산마루 돌아
강 건너 소주 취해 죽은 봄 나라
백일홍 자면 천일홍 피지
쑥부쟁이 피는 나라 팔려간 나라
밀짚꽃 피는 나라 사막의 나라
정호승 선생님은 1979년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를 출간한 이후 2022년 <슬픔이 택배로 왔다>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20권의 시집과 <참새>,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산산조각>, <고통없는 사랑은 없다> 등 동시와 동화, 우화, 산문집 등 20여 권을 펴냈다.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1950년 1월에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정호승 선생님은 어린 시절 일찌감치 대구로 나왔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족들은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집에선 닭을 키웠고, 소년 정호승은 매번 학교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했으며, 고교 졸업 때는 졸업비를 못내 졸업앨범을 받지 못했다. 가난은 그의 일상이 되었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그 시기 위안이 된 것이 문학이었다. 단칸방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대학에도 꼭 가고 싶었다. 어렵게 문예장학생으로 경희대에 입학했지만 2학년 등록금을 낼 형편이 못 되자 자원입대했다. 1972년 야전공병단 복무 중 응모한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듬해에는 대한일보에 시 <첨성대>가 당선됐다. 그리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면서 그는 소설가의 꿈을 가지게 됐다. 샘터와 여성동아, 월간조선 기자로 10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한 뒤 1991년 소설을 쓰기 위해 회사를 나왔다. 전업작가가 된다는 건 큰 모험이었다.
경희대 입학식에서 정호승 시인과 어머니
푸르메재단이 설립된 초기의 일이다. 설립기념으로 책 한 권을 기획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숨이 턱에 차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맞게 된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젊은 날의 추억을 각계 인사들에게 글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거절한 분도 있었지만 김혜자, 안성기, 장영희, 김창완, 엄홍길, 원택스님, 홍세화 씨 등 정말 많은 분이 소중한 원고를 보내주셨다. 이 원고들이 모여 <네가 있어 다행이야>라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돼 소중한 인연들이 맺어졌다. 엄홍길 대장은 재단 홍보대사, 원택스님은 재단 이사, 그리고 정호승 선생님은 열혈후원자가 되어주셨다.
일 년에 두세 번 정호승 선생님을 뵙는다. 새로운 시집이 나오면 사인한 책을 보내주시거나 사무실에 들러 책에 사인해주신다. 올해 초 방송인 이금희 선생님과 재단 홍보대사인 이지선 이화여대 교수로부터 점심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이왕이면 정호승 선생님도 모시자고 했더니 두 사람은 물개박수로 환영했다. 정호승 선생님은 모든 사람이 만나고 싶은 분일 것이다. 서촌의 작은 식당에 네 사람이 모였다. 이날의 주인공은 단연 정호승 선생님이었다.
‘누구에게나 벽이 있듯 시인 정호승에게 소설은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이다’라는 글귀를 읽은 것 같다. 선생님께 혹시 올해 소설을 쓸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젊은 시절 소설이 그렇게 쓰고 싶었습니다.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7년 동안 소설 쓰기에 몰두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인 40대를 허비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문학 장르가 다양한데 소설이 저에게는 맞지 않고 시적 기질이 맞는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 거지요. 소설에 대한 아쉬움을 산문집이나 우화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푸르메재단을 찾아 시집에 사인하는 정호승 시인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오래가는 것 같다. 주말이 되면 온 가족이 12인치 흑백TV 앞에 둘러앉아 ‘쇼쇼쇼’와 ‘가요무대’를 시청했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가족들은 박수를 쳤다. 우수에 가득 찬 표정으로 <개여울>을 부르던 정미조와 <못 잊어>의 패티 김이 단골손님이었다. 나중에 그 노래들이 김소월의 시라는 것을 알게 됐다. 100년 전의 시가 사라지지 않고 아직 우리 삶 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김소월은 <진달래꽃>, <못잊어>, <초혼>, <개여울>, <엄마야 누나야>,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 우리 정서에 와닿는 시 200수를 남겼고 이중 20여 편이 노래가 됐다. 그는 사랑하는 임, 기다림, 고향 등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민족적인 정서를 시로 승화시켰다. 소월과 가장 맞닿는 시인이 정호승이 아닐까. 정호승 선생님의 시를 읽다 보면 첫눈이 내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되고, 눈물이 나오고, 끝내 오지 않을 님을 그리며 꿈을 꾼다. 100년 전 김소월이 어느덧 정호승이 된다. 소월의 시가 호승의 시로 내려앉은 것 같다.
얼마 전 거리를 걷다가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의 노래를 들었다. 정호승 선생님께 당신 시가 노래로 불리는 것에 대한 감회를 물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네요. 가수 송창식 씨가 서정주 시인의 ‘푸르른 날’ 구절이 좋아서 노래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서정주 시인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거절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막상 만난 서정주 선생으로부터 ‘당신처럼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노래를 불러서 내 시가 더 유명해진다면 찬성한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고 하네요. 저의 시도 사랑받는 노래가 된다면 그거야말로 행복한 일이지요.”
(2편에 계속)
<장애청소년들과 떠나는 JSA 여행>에서 시를 낭송하는 정호승 시인
<수선화에게>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글= 백경학 상임대표
*사진= 정호승 시인 제공, 푸르메재단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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