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장애인이 더 많은 세상이라면> 박윤영 · 채준우 작가 인터뷰
<장애인이 더 많은 세상이라면> 에피소드 중...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가려면 지하철을 갈아타야 하는데, 보이는 건 죄다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뿐, 비장애인을 위한 계단이 없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벽면 귀퉁이에 붙어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 비장애인 환승방법 -
승차장 10-1로 이동하면 샛길이 있습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50m 이동한 다음 계단으로 지하 2층까지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화장실 옆 골목으로 들어가세요. 화장실을 크게 돌아 반대쪽으로 이동한 다음 다시 지하 1층으로 올라가세요. 그 앞에 개찰구가 있습니다. 교통카드를 찍지 말고 나오셔서 그 앞의 계단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가세요. 나간 다음 화살표 방향으로 700m 정도 이동하면 지하철역 계단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지하로 내려오시면 환승하실 수 있습니다.
휠체어‧유아차 등을 이용하는 승객의 환승 방법이 적힌 실제 지하철 안내도
커다란 전동휠체어에 마치 인형처럼 앉아있는 작은 여자와 키도 몸집도 큰 남자가 나란히 푸르메재단 건물로 들어옵니다. 미리 책에서 본 ‘작고’ ‘귀여운’ ‘큰’ 등의 수식어를 조합해 상상만 했던 그들을 실제로 마주하자, 글로만 존재하던 책의 내용이 일제히 생명력을 가지고 되살아납니다.
<너와 함께한 모든 길이 좋았다>와 <장애인이 더 많은 세상이라면>을 함께 쓴 두 작가 ‘박윤영’ ‘채준우’ 커플을 만났습니다. 앞선 책은 두 사람이 45일간 유럽 여행을 다녀와서 쓴 여행기이고, 후자는 국내의 장애 문제를 조명한 청소년 교양서죠. 두 책 모두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시각을 동시에 담아냈는데, 같은 장소에서 이토록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충격을 안겨줍니다. 흥미진진하다가도 순간 화가 치밀어오르고, 한껏 달달함이 감돌다 뒷맛을 씁쓸하게 만드는 이 책들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사랑이 시작된 순간
박윤영 작가(오른쪽)와 채준우 작가
“함께 길을 걸을 땐 앞서서 날 안내하기보다 손을 잡고 나란히 걷기를 원했고, 심지어 길가에서 자동차가 다가올 땐 내 뒤로 숨었지. 맨살보다 휠체어가 조금 더 단단하지 않겠냐는 너의 그 빈약한 논리에 나는 너무 웃음이 나. 나는 너 덕분에 더 이상 애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사람이 되었지. 너를 만날 때 비로소 내가 나다워질 수 있었던 거야.” - <장애인이 더 많은 세상이라면> 중 -
준우 씨는 늘 윤영 씨 옆에 섭니다. 으레 휠체어 탄 사람과 미는 사람이 앞뒤로 자리를 잡는 반면, 준우 씨는 윤영 씨 옆에서 휠체어가 아닌 윤영 씨의 손을 잡고 다닙니다. 옆에 나란히 선다는 것. 윤영 씨에게는 동등한 자아로 인정받은 것만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요?
“장애인 자립을 돕는 직장에서 윤영을 처음 만났어요. 처음부터 가장 편한 사람이었죠.” 당시 준우 씨는 힘든 일을 겪고 있었습니다. 다들 술 마시고 잊으라는 얘기뿐이었답니다. “그때 윤영만 저보다 더 화를 내면서 진심으로 공감해줬어요. 그때부터 윤영을 향한 마음이 커졌죠.” 윤영 씨는 그때의 준우 씨를 “필요할 때 돌아보면 늘 옆에 있었던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인생을 바꾼 순간들
비장애인으로 살기를 그만두었더니 오히려 장애인이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윤영의 눈에 보였다. 장애를 가진 당사자로서 올바른 관점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 <장애인이 더 많은 세상이라면> 중 -
‘골형성부전증’이라는 희귀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박윤영 작가. 재채기만 해도 뼈가 부러질 정도로 약해 휠체어를 탑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등교를 거부당해 중‧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는 23살에 독립을 선언하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같은 장애를 가지고도 학교나 직장을 다니며 평범한 일상을 사는 선배들을 보며 용기를 얻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어느 날 찾아온 일본 연수의 기회. 박 작가는 기꺼이 붙잡았습니다. “복지 선진국이라는 일본의 장애인들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고 싶었어요.” 도로는 평지로 잘 닦여 있고, 버스든 상점이든 장애인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곳. 처음 맛본 자유였습니다. “한 친구가 상점의 낮은 턱을 보지 못하고 들어서다 휠체어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어요. 바로 상점 책임자가 달려 나와 턱을 없애지 않은 본인의 탓이니 치료비를 전부 배상하겠다고 했어요. 턱을 없애지 않은 점을 잘못이라고 말한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웠죠.”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는 일본의 장애인들을 만난 후 그녀는 장애 정체성이 선명해졌다고 말합니다. “그전에는 비장애인인데 걷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때부터는 장애를 인정하고 당당히 살 수 있게 됐어요. 여러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하고, TV 여행 리포터로도 활동하면서 적극적으로 장애를 드러내는 계기가 됐지요.”
윤영이 등장한 이후 제 삶에는 일종의 전환 스위치가 켜진 것 같습니다. 비장애인만 존재하던 좁은 세계가 단숨에 확장된 것 같았죠. - <장애인이 더 많은 세상이라면> 중 -
채준우 작가의 세계가 변한 건 ‘윤영의 손을 잡으면서부터’입니다. “그전에는 장애인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버스에 타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장애를 가진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던 준우 씨는 윤영 씨를 만나면서 수없이 화가 났고 수많은 의문의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누군가 학교에 가지 못하고, 버스를 타지 못하고, 영업 중인 가게에 들어가지 못하는 게 당연할 리 없잖아요.”
국내 장애인 복지는 지금 어디?
‘특권’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굉장히 불편했습니다. 단지 비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가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그러다 윤영을 만나버렸어요...그동안 제가 비장애인이라서 겪지 않아도 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 사회에서 특권을 누려왔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장애인이 더 많은 세상이라면> 중 -
“중‧고등학교 입학을 거부당했을 때, 윤영이도 학교는 다녀야 하지 않냐고 말해주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어요. 초등학교에 갈 때 이미 한 차례 전쟁을 치렀던 엄마는 이미 지쳐있었고요. 사실 엄마에게도 지지자가 필요했죠. 푸르메재단이 장애 가족들에게 그런 역할을 해준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최근 지하철에서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 몇몇과 마주친 것을 떠올리며, 우리나라도 장애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높아지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두 작가가 최근에 겪었던 일을 얘기해줍니다.
“얼마 전 고양시의 대형 쇼핑몰을 다녀왔어요. 역에서 거리가 좀 있어 버스를 타려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정류장으로 건너가는 횡단보도는 없고 계단만 잔뜩 있는 지하도뿐이었어요. 돌아오는 길은 더 험난했죠. 예전에는 경기도 장애인 콜택시로 서울에 올 수 없었어요. 그런데 최근 법이 개정되면서 장애인 콜택시로 서울까지 올 수 있게 됐죠. 이용해보자 싶어 택시를 불렀는데 2시간이 지나도 깜깜무소식인 거예요. 연락을 했더니 그제야 기사 2명 중 1명이 휴가라, 관할지역을 다 돌고 인근 지역까지 배정이 되려면 앞으로도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어요.”
어디서부터 바뀌어야 할까. 박 작가는 결국 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먼저 나서서 바꾸지 않고 미루기 바쁘니 법적 강제성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미국에서는 안내견과 우버택시에 승차하려다 수차례 거부당한 시각 장애인을 위해 ‘미국 중재협회’에서 우버 측에 12억 원을 배상하게 했어요. 중재협회는 미국 의회가 설립한 비영리단체이지요. 장애인을 위해 국가가 대신 나선 거예요.”
한국은 어떨까요? 3년간 버스로 통학하다 수차례 탑승을 거부당한 뇌병변장애인이 버스업체들과 지자체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를 했습니다. 법원은 버스회사에 각 100만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지만, 지자체에는 관리 소홀 업무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기각했습니다. 해당 지자체는 소송비용 826만 원을 되레 장애인에게 청구했습니다. 미국은 공익소송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면 패소해도 비용을 부담하지 않도록 한 것과는 차이가 있지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께 걷고 쓰고 꿈꾸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보지 않아도 상관없어”라는 그녀의 말이 정말 관심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포기인지... (중략) “높은 곳은 융프라우로 족해.” 이런 그녀의 말에 얼마나 많은 포기가 담겨 있었던 걸까. - <너와 함께한 모든 길이 좋았다> 중 -
<너와 함께한 모든 길이 좋았다>는 시중에 찾아보기 힘든 휠체어 여행 정보를 공유하자는 윤영 씨의 제안을 준우 씨가 수락하면서 세상에 나온 책입니다. 그 안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그래서 윤영 씨를 엉엉 울린 준우 씨의 속 깊은 생각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내 마음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에, 준우가 알아준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어요. 고마웠죠.”
“...단지 장애인이 좋으면 비장애인도 좋고, 비장애인도 언제든 장애인 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비장애인이 장애 문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며, 장애 문제의 해결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 <장애인이 더 많은 세상이라면> 중 <장애학의 도전>, 김도현, 오월의 봄 인용 -
<장애인이 더 많은 세상이라면>은 출판사의 제안을 받은 윤영 씨가 다시 한 번 준우 씨에게 공동집필을 부탁해서 나온 책입니다. “저 혼자 쓰면 단순히 장애인의 입장만 대변한 책이 될 것 같았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시각을 모두 담아 다양한 독자를 아우르고 싶었어요.” 준우 씨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지만 비장애인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어요.”
준우 씨에게 윤영 씨는 ‘같은 세상을 함께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같이 하고, 같은 꿈을 꾸고 싶은 사람이죠.” 언젠가 다른 커플들처럼 입구의 계단 유무보다 유명한 맛집을 찾아가 함께 맛보고, 모든 장소의 끝까지 함께 올라가 아름다운 뷰를 윤영 씨 옆에 나란히 서서 함께 보기를 꿈꿉니다. 윤영 씨에게 준우 씨는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더 오래 더 많은 것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같이 보고 느끼고 공유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은데 벌써 시간이 부족한 것 같아 아쉬워요.”
그런 그들이 지금 이 순간 함께 하고 싶은 일은 <장애인이 더 많은 세상이라면>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얘기들을 모두 담은 만큼 모두가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때가 되면 우리 사회도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요?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찾아가서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글= 지화정 대리 (커뮤니케이션팀)
*사진= 지화정 대리, <장애인이 더 많은 세상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