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의 읽을 권리] 장애는 빼기(-)가 아닌 더하기(+)다
<발달장애인의 읽을 권리> 11화
지난 11월 첫주는 저에게 축제와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발달장애인의 함께하는 즐거운 책 읽기를 위한 낭독극을 계획하다 보니 출판 뿐 아니라 공연예술 분야에도 살짝 발을 담그게 되었지요. 모르니 궁금하고 온통 공부할 것 투성이인 답답한 상태로 지내다 국내 장애예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행사에 참여했는데, 뜻밖의 성과를 얻었거든요.
<모두예술주간 2023>이라는 타이틀의 이 행사는 ‘장애예술 매니페스토’를 주제로 국내외 강연, 라운드 테이블, 워크숍, 전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장애예술의 주요한 이슈를 논의하고, 비장애인 중심의 균일한 예술상을 거부하며 장애예술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는 새로운 담론의 장으로 초대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출처 : '모두예술주간' 공식 웹사이트>
모두예술극장 외관. <출처: '모두예술극장' 공식 웹사이트>
모든 프로그램이 지난 10월에 개관한 따끈따끈한 신상 공간인 모두예술극장에서 진행된다는 점도 참 좋았습니다. 모두예술극장은 장애예술인들의 창작·육성·교류 활동을 위해 조성된 국내 첫 ‘장애예술 공연장’으로, 장애예술인들과 기술 스태프가 물리적 제약 없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창작의 과정·공연·운영 서비스 전반에 걸쳐 편의성과 접근성을 실현한 곳이라고 합니다. <출처 : 모두예술극장 공식 웹사이트>
'장애'는 이미 완성된 몸
이토 아사(도쿄공업대학 미래인류연구센터 디렉터) <출처: '모두예술주간' 공식 웹사이트>
여러 강연과 워크숍에 참석하였고 그 중 ‘이토 아사’란 연구자의 <장애의 감각으로 존재한 적 없는 사회를 상상하기>라는 강연 내용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주로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특정 장애와 상관없이 장애 영역 전반을 아우를 수 있는 훌륭한 강연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것은 그녀가 말한 장애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녀는 장애를 무엇 무엇이 없는 상태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몸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에 더해 ‘장애를 뺄셈으로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예를 들면 시각 장애가 정상인에서 시각 능력을 뺀 상태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시각장애 ≠ 정상인 – 시각 능력). 시각 능력이 없는 상태로 이미 완전한 몸이라는 말이지요. 장애를 정상의 기준에서 무언가가 결여된 상태로 알고 살아온 저에겐 너무나 신선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관점이었습니다.
이토 아사 워크숍 '보이지 않는 나라를 디자인하기' <출처: '모두예술주간' 공식 웹사이트>
그녀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요즘 시각장애인과 미술작품을 함께 감상하는 프로그램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시각장애인과 비장애인 몇몇이 그룹을 지어 전시회에 가고, 비장애인들은 표현력에 상관없이 돌아가면서 자기가 본 그림을 시각장애인에게 설명합니다. 잠시 저는 그 상황을 떠올리며 그룹의 한 사람이 되어봅니다. 그림을 ‘본다’라는 것은 당연히 시각 능력의 작용이라 여기는 저는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군요. 같은 그림을 보지만 앞 사람들의 이야기는 제 생각과 너무 달라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시각장애인은 차분히 설명을 들은 후 여러 질문을 던지고 열정적으로 대화를 이어갑니다. 작품에 빠져든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습니다. 그림을 보고 있는 저보다 더 생기 넘치고 충만한 표정이네요. 설명할 차례가 되었어도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는 저를 위해 우스갯소리로 시간을 벌어줍니다. 꼭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된다며 긴장을 풀어줍니다. 저는 노을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색감을 힘겹게 설명하다가 연달아 떠오른 유년기 속 한 장면을 묘사해 봅니다. 그림의 제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인데다 어휘력과 통찰력은 빈약하기 그지 없어 몹시 민망하지만 그 어떤 전시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색다른 감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일본에서 화제를 모은 책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전시장을 나오며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이 이 특별한 전시 감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감상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해보았다고, 볼 수 있는 능력만으로 시각장애인 보다 우월하다 여기며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다고, 감상의 방해 요소는 장애가 아니라 각자가 가진 무수한 색안경이란 사실을 깨달았다고요. 모두가 입을 모아 전에 없던 놀라운 경험을 해보았다며 다음 기회에도 꼭 티켓팅에 성공하고 싶다고 하네요.
장애가 기존의 질서를 바꾼다
뿌듯한 기분으로 상상에서 빠져나온 저는 곧바로 또 다른 장면을 그려 보았습니다.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함께 모여 인문학 토론회를 한다면?”
그녀가 소개한 게임체인저(Game Changer)로서의 장애의 역할도 맥락을 같이 합니다. 장애는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함께 기존의 질서를 바꿀 수 있다고 목소리를 냅니다. 시각장애인과 함께 하는 그림 감상이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가슴 벅찬 일인지, 발달장애인과 문학을 토론하는 수업이 얼마나 기발하고 창의적인 활동으로 가득 차 있는지 이야기 합니다. 장애와 함께라면 지금까지 상상해 보지 못한 수많은 도전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습니다. 강연 막바지에 그간 막연하게 제 머리 속에서 떠돌기만 하던 생각들이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듯 하여 가슴이 뛰었습니다. 뺄셈이 아닌 덧셈의 존재인 장애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전부터 발달장애청(소)년과 부모님으로 구성된 자조모임 멤버들과 함께 제가 제 아들에 대해서 쓴 책인 <걱정이랑 친구할래?>로 낭독극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학교 등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지난 모임에서는 자기개념과 신체적 자기인식에 대한 설문 시간을 가진 후, 나에 대한 다양한 주제로 미니북 만들기를 해보았습니다. 빽빽한 글씨의 설문지를 꼼꼼하게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그 과정에서 발견한 자신의 모습 중 하나를 글로 표현하는 활동입니다. 20 페이지가 넘는 대본이 처음엔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함께 읽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해서 뚝딱 읽어냅니다. 극단의 연습 공간을 빌려 우리끼리 해보고 있지만 누가 와도 즐겁게 참여하고 많은 것을 배워갈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비장애인의 세상에 발달장애인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 비장애인을 발달장애인의 세상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기만 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대등하게 영감과 창작 아이디어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발달장애인이 참 멋지구나!’, ‘발달장애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꽤 즐겁고 나에게 도움도 많이 되네!’ 라는 생각이 멀리멀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결국엔 장애가 이 세상에 덧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글= 조윤영 대표 (도서출판 날자)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외
조윤영은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이자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을 만드는 '도서출판날자'의 대표입니다. 걱정이 많은 아들 예준이의 일상 에피소드로 「걱정이랑 친구할래?」를 펴낸 작가이기도 합니다. 발달장애인도 책을 읽을 권리가 있고, 그를 통해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희망으로 읽고, 듣고,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