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의 읽을 권리] 낭독극 꽃이 피어난 교실

<발달장애인의 읽을 권리> 10화


 


오늘은 OO고등학교 특수학급에서 방과 후 낭독극 프로그램 두 번째 수업이 진행되는 날입니다. 관객 역할을 하겠다는 몇몇을 빼고 특수반 학생들 대부분 참여하고 있습니다. ‘해설1’과 무대 및 음향 감독 역할을 맡은 비장애 학생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높은 경쟁률을 뚫은 학생들로 그 뜨거운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상기된 표정입니다. 지난 북바인딩 수업에서 직접 만든 대본집에 이것저것 적기도 하고 스티커를 붙여 꾸미기도 해봅니다. 벌써 대본집은 물론이고 원본 도서를 찾아 다 읽고 온 친구도 있습니다.



낭독극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앞서, 특수교사와 통합연극 전문강사로 이루어진 교사진은 학생들과 여러 번 깊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관심있어 하는 주제나 선호하는 이야기 장르를 비롯해서, 언어와 신체적 표현 정도, 감정을 드러내거나 상상력을 발휘하는 방식 등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록하였습니다. 사물을 조작하는 모양새나 음향에 반응하는 정도가 어떠한지도 면밀히 살폈습니다. 프로그램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준비이며 프로그램 전후 학생들의 변화를 확인하기 위한 중요한 데이터가 되기 때문입니다.


첫 수업에서 함께 해본 ‘기차놀이’ 덕분인지 낭독극이라는 생소한 형식에 대한 거부감이나 처음 본 선생님과 친구를 향한 어색함이 많이 줄었습니다. 규칙의 중요성과 함께 만든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해 본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날 수업의 웜업 활동은 ‘웃는 의자, 우는 의자’입니다. 진심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장애의 문제를 떠나 짧은 시간에 순간적으로 감정을 끌어내는 것은 모두에게 어렵습니다. ‘웃는 의자, 우는 의자’의 활동 목표는 웃고 우는 감정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모방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하고, 울고 싶지 않아도 울어야 하는 경험을 하면서 감정을 선명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웝업 활동 후 본격적인 낭독 연습을 시작합니다. 자칫 지루하고 어렵다고 느껴질 때를 대비해서 여러가지 타악기를 사용한 규칙을 만듭니다. 여기에 익숙해지면 그 타악기들로 자신만의 리듬도 만들어봅니다. 각자 다른 악기로 다른 리듬을 타며 릴레이로 만들어지는 소리는 하나의 음악이 됩니다. 여기서 타악기는 ‘신호’의 역할로도 사용됩니다. 서로의 신호가 모여 하나의 음악을 만드는 경험을 통해 자연스레 협동심과 사회성을 기를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수업을 하는 날. 구경만 해도 재밌다는 소문이 나서 그런지, 연습이 한창인 특수반 교실을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교과 선생님들이 참관하거나 응원을 위해 들르시기도 합니다. 이날은 각자 맡은 역할을 가면으로 만들어 봅니다. 가면은 인물을 객관화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자신이 만든 가면을 쓰면, 연극의 본질인 ‘허구의 예술’을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행위는 자신이 아닌, 자신이 맡은 역할임을 인지하는 시간입니다. 장애에 얽매이지 않으며, 살아가면서 행해야 할 여러가지 역할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하는 기회가 됩니다.



방과 후 수업 마지막 주, 드디어 공연을 하는 날입니다. 낭독극이기에 책상과 의자 정도만 있으면 되는 간단한 무대이지만, 지난번 연습 때부터 색색의 테이프로 자기 영역을 구분하고 꾸며 놓았더니 새로워 보입니다.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니 늘 봐서 익숙한 교실이 아니라 환상과 일상이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특수반, 그리고 원반 친구들로 이미 북적북적한 교실에, 프로그램 시작부터 큰 관심을 보여주신 교장선생님을 비롯해서 여러 교과 선생님, 행정실과 급식실 선생님들까지 정말 많은 이들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관중석을 꽉 채웠습니다. 열린 대본이라 실수가 나와도 자연스럽게 처리하는 방식을 익혔고 음악과 함께 하는 커튼콜 상황까지 꼼꼼히 준비했기 때문에 공연은 긴장감보다 축제 분위기에 가깝습니다. 낭독극이 끝나자 참여자 모두에게 쏟아지는 환호와 함성으로 귀가 얼얼할 지경입니다.


전문성과 열정으로 한 학기의 낭독극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끈 선생님들은 공연 후 소회를 이렇게 전했습니다. “보고 읽는 낭독극이긴 하지만, 본인의 대사와 순서를 외우고 동작과 소품 사용법 등을 익히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수많은 약속으로 이루어진 연극의 원리를 학습하고 적용하는 모습이 정말 대견했지요. 수업에 대한 흥미와 열정은 비장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수업들보다 훨씬 더 뜨거웠어요. 주 1회 50분 수업으론 너무 부족해서 정해진 시간을 넘기는 날이 더 많았지만 늘 즐거웠습니다.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무척 보람차고 만족스런 경험이었습니다. 연말에 이 아이들과 전문 공연장에서 따로 공연을 준비해 보려 합니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좋은 공연이 될 것입니다.” (통합연극전문강사)


“(아이들은) 20장이 넘는 종이에 꽉꽉 채워진 긴 글을 눈으로 입으로 읽고 또 읽는 것을 전혀 지루해 하지 않았습니다. 반복을 통해 글의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고, 그것에 맞는 감정을 연기했습니다. 연극 원리나 용어에는 박사가 되었어요. 중간에 등장인물에게 편지나 시를 써주는 활동이 있었는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데 막힘이 없어졌어요. 앞으로는 좋은 책을 읽고 대본을 쓰는 단계부터 함께 해볼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 프로그램과 공연을 함께 하며 정이 많이 든 친구들이 모임을 만들어서 주기적으로 만나기로 한 것입니다. 특수반, 원반 할 것 없이 다 같이요. 이런 게 진정한 통합교육 아닐까요?“ (OO 고등학교 특수반 선생님)


이 모든 장면들이 현실이 되는 날을 그려봅니다. 이제 곧 성인이 되는 내 아이는 누릴 수 없을 터라 서글프기도 하지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가능성 없는 헛된 상상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수많은 것들은 과거 누군가의 작은 상상에서 시작된 일이니까요.


(** 연극적 장치나 놀이에 대한 설명과 의미는 ‘걱정이랑 친구할래?’ 낭독극 프로그램을 만드신 전문 연출가와 상의 후 소개합니다.)


*글= 조윤영 대표 (도서출판 날자)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조윤영은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이자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을 만드는 '도서출판날자'의 대표입니다. 걱정이 많은 아들 예준이의 일상 에피소드로 「걱정이랑 친구할래?」를 펴낸 작가이기도 합니다. 발달장애인도 책을 읽을 권리가 있고, 그를 통해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희망으로 읽고, 듣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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