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위대한 유산 1편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장춘순 여사 1편


 


“살면서 가장 큰 축복은 우리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아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서게 됐습니다. 10년 전 흙 묻은 돌에 불과했던 이 땅이 솜씨 좋은 세공사를 만나 푸르메소셜팜이라는 빛나는 보석이 됐습니다. 저는 이 농장이 장애인 가족들의 희망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울음이 터질까 조마조마했다. 장춘순 여사가 인사말을 마치고 단상을 내려오자 남편 이상훈 회장이 다가가 부인 손을 잡았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상훈 장춘순 부부이상훈·장춘순 부부


유리온실을 짓기 위해 불도저로 밀어낸 4000평 벌판에 바람이 불더니 흙먼지가 일었다. 경기도 여주시 오학동 47번지, 발달장애 청년의 일터를 짓기 위한 푸르메 여주농장 착공식 현장이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누구보다 평탄한 삶을 살았을 부부였다. 겉으로 평탄해 보여도 실제로 평탄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 덕희 씨로 인해 부부의 삶은 뒤틀렸다. 첫 딸을 낳은 후 5년을 기다린 아들이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백일이 되면 다른 아이들처럼 몸을 뒤집고 옹알이를 해야 하는데 전혀 미동이 없었어요. 조금 늦되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돌이 되도록 아이가 눈도 안 맞추고 떼도 안 쓰고. 그때 비로소 ’내 아들이 장애를 가졌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30년 전만 해도 발달장애라는 개념조차 세워지지 않은 때였다. 단지 아이가 남들보다 행동이 느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데 불편한 점이 많겠구나’ 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가 커갈수록 의사를 표현하고 또래 집단과 어울리는 것이 어려웠다. 부부간의 갈등도 커졌다. 남편이, 그리고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장애아 부모에 비해 경제적으로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미국 유학을 다녀와 시아버지가 세운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장 여사는 아이가 커갈수록 미래를 설계하기는커녕 점점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착공식 현장착공식 현장


그때 여주 땅이 생각났다. 건설회사의 임원이던 시아버지가 젊은 시절부터 차근차근 마련하신 곳이다. 남편은 어린 시절 논이었던 이곳에 물을 채워 빙판이 되면 썰매를 탔다고 했다. 60년 전 다방 커피 한 잔 값이면 경기도 외곽 땅 한 평을 살 수 있었다. 시아버지는 커피를 줄이고 용돈을 절약해 여주시 오학동에 2만 평이 넘는 땅을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부부는 아들이 성인이 됐을 때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결론은 농사였다. 몸은 힘들지만 정성을 다해 작물 키우는 농사는 정직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못한다. 하지만 부부는 남달랐다.


장춘순 여사에게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강한 아들을 만들기 위해선 자신이 먼저 강한 부모, 강한 엄마가 되어야 했다. 장애를 이해하기 위해 늦깎이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선진국에서는 장애어린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가 어떤 준비를 하는지, 장애아들이 어떤 농사를 짓는 것이 좋은지 확인하기 위해 유럽의 장애인 작업장과 네덜란드 농장을 찾아갔다. 유럽의 한 작업장에서 만난 청년은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 반죽을 하고 있었다. 이 청년이 말랑말랑한 감촉에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서 아들도 이렇게 행복하게 농사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옛날 비닐하우스 농장 모습옛날 비닐하우스 농장 모습


우여곡절 끝에 시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 위에 15동의 비닐하우스를 세웠다. 생활하기 위해 작은 콘테이너집도 지었다. 그 무렵 발전소와 대형 선박에 들어가는 정밀계량기 제조회사를 세운 남편은 몸이 두 개라도 부족했다. 이른 새벽 서울 사무실로 출근했다가 서둘러 퇴근했다. 농사일을 거들기 위해서였다. 부부는 전국을 돌며 질 좋은 춘양목을 구해 표고버섯을 키웠다. 수익성이 좋다는 인삼의 수경재배도 시도했다. 하지만 도시 생활에 익숙한 부부에게 농사는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밤늦도록 농업 관련 서적을 읽고 농업대학까지 입학했지만 농사일을 배우면 배울수록 4000평 규모의 농장을 가족 세 명이 운영하는 것은 힘에 부쳤다.


“하루는 수확한 버섯과 인삼을 납품하기 위해 대형마트에 갔습니다. 주차장에 짐을 내리는데 어린 주차직원이 달려와 ‘차 빼라!’고 반말로 고함을 치는 거예요. 마트에 납품할 농산물이라고 여러 번 설명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농작물 납품하는 사람을 이렇게 무시하는구나. 화가 나고 서러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이런 대우를 받을 정도면 우리 아이가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됐습니다.” 이상훈·장춘순 부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의 힘으로 농장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했다. 판로를 찾지 못한 인삼은 속이 타들어 가듯 조금씩 뿌리부터 썩기 시작했다. 때때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실패에 익숙해져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유머를 잃지 않고 묵묵히 버팀목이 돼주던 남편도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그때 신문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립이고, 푸르메재단이란 곳에서 발달장애 청년의 자립을 위해 스마트농장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푸르메재단이 어떤 곳인지 알아봤다. 신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부도 외면한 어린이재활병원을 시민의 힘을 모아 건립했다고 들었어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고요. 이곳에 농장 터를 기부하면 누구보다 잘 지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스마트팜 건립 약정식(왼쪽부터 김동섭 SK하이닉스 사장, 장춘순·이상훈 부부, 강지원 푸르메재단 이사장)스마트팜 건립 약정식(왼쪽부터 김동섭 SK하이닉스 사장, 장춘순·이상훈 부부, 강지원 푸르메재단 이사장)


부부는 그길로 푸르메재단을 찾아갔다. 남편 이상훈 회장이 말문을 열었다. “부친이 틈날 때마다 정성을 다해 나무를 심으셨어요. 가족의 손때가 묻은 곳입니다. 우리 아이 같은 친구들을 위해 좋은 일터를 만들어 주세요.”


만약 SK하이닉스가 없었더라면 농장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지을 파트너를 찾다가 여주와 이웃한 이천에 국내 최대 규모의 반도체공장인 SK하이닉스가 떠올랐다. 최태원 회장의 주도로 SK는 환경 및 사회문제 해결, 투명 경영을 기치로 한 ESG 정책을 강하게 추진 중이었다. 발달장애인의 평생 일터인 농장을 지어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ESG가 어디 있겠는가.


때마침 사회공헌 책임자가 김동섭 사장과 박용준 부사장이었다. 두 사람은 장애인 자립에 관심이 있었다. 새로운 사회공헌 모델을 찾고 있던 두 사람이 의기투합하면서 스마트농장 건립사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마침내 SK하이닉스가 전체 농장건립비 3분의 일에 해당하는 50억 원을 흔쾌히 기부하자 여주시와 한국지역난방공사도 동참했다. 이상훈·장춘순 부부의 감동적인 사연이 조금씩 알려지자 후원하는 시민도 눈에 띄게 늘었다. 스마트팜 건립은 막연한 희망에서 한 발자국씩 현실로 다가왔다.


완공된 농장 모습(유리온실+교육문화동/카페) 푸르메소셜팜 유리온실 전경


*글=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사진= 푸르메재단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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