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애아 엄마의 해방일지

<발달장애인의 읽을 권리> 4화


 



2022년 작품성과 화제성을 동시에 인정받아 많은 사람들의 올해의 책 목록에 오른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란 책을 얼마전에 읽어보았습니다. 좋은 책이 언제나 그렇듯, 읽는 동안만큼은 일상의 모든 번잡함에서 벗어나 온전히 그 세계에 푹 파묻혀 울고 웃으며 조금 더 확장된 내 자신을 만났습니다. 설레고 행복했던 시간이지요. 책의 후반부 즈음, 저를 뼈저리게 돌아보게 하는 문장들을 만났습니다. 평생 빨치산이란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다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지키던 주인공의 독백 장면입니다.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에는 ‘빨치산’이 부모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정지아, 2022, pp. 224-225) 


이 부분을 읽을 때 제 머리 속에서는 거의 즉시 ‘빨치산’이라는 단어가 ‘장애인’으로, ‘딸’이라는 단어는 ‘엄마’로 교체됐습니다. 그런 상태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어떤 엄마인지, 어떤 엄마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엄마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장애인엄마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장애인엄마라는 말에는 ‘장애인’이 자식이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자식에게도 마땅히, 부모가 자식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부모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장애인엄마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지적장애를 가진 아이의 엄마로 세상에 나와 아이가 성인기를 눈앞에 둔 고3이 되어서야 희미하게 느껴지던 어떤 문제의식이 이 문장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찰나의 순간에 큰 깨달음이 다가왔습니다. <걱정이랑 친구할래?> 책의 서문에 ‘장애라는 꼬리표 뒤에 숨겨진 다양한 이야기들을 세상에 남기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지만 의식의 저변에 저런 생각들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장애라는 굴레 안에서는 모든 것이 문제로만 보였습니다. 남들과 다른 아이의 모습을 문제점으로 여겨 거기에만 집중했고 조금이라도 고쳐보고자 아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썼습니다. 피해의식에 시달렸고 제가 저지른 많은 어리석은 행동들마저 장애아의 엄마라는 이유를 내세워 못본 채 하곤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내 아이의 본질과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지, 아이는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원하는지 충분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아이가 그런 생각과 감정을 가진 주체라는 것조차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장애가 있지만 자신이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인지, 얼마나 다양한 모습과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인지 아이에게 알려주고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성심껏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장애인 차별 철폐라는 중요한 의제 논의보다 재활과 극복을 강조하며 일회성의 보여주기식 행사로 지나가는 ‘장애인의 날’이나, 장애와 역경을 이겨낸 개인의 성공 스토리가 장애 인식 교육이라고 여기는 이 사회의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이의 장애에 가장 갇혀 있던 사람이 바로 엄마인 저 아니었을까요? 아이의 10대 마지막 해에 이르러서야 이런 각성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어딘가에 저와 같은 처지의 수많은 부모님들이 계실 거라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깝습니다.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을 기념하는 장누리 미술심리상담가와 딸 온유'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을 기념하는 장누리 미술심리상담가와 딸 온유


신체의 기능 일부가 적절하게 (혹은 우리 사회가 용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아 물리적인 한계가 생겼고 장애인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그것이 한 사람의 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장애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문제 안에 한 사람을 가두어서는 안됩니다. 공동체가 먼저 나서서 당사자와 당사자 가족이 이런 인식에 빠지지 않도록 도울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장애를 보는 시선이 바뀌고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장애’라는 문제가 아닌 ‘장애 차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점을 찾아가면 좋겠습니다.


4월은 3일의 간격으로 장애인의 날과 책의 날이 함께 있는 달입니다. 한 사람의 발달장애인을 장애에만 집중하여 문제 해결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장애뿐 아니라 각자의 세계를 가진,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 중 한 명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야 왜 ‘장애인의 날’이 아닌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 되어야 하는지, 왜 발달장애인에게도 독서 문화가 필요한지를 제대로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글= 조윤영 (도서출판 날자 대표)
*사진= 조윤영, 게티이미지뱅크




조윤영은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이자 발달장애인을 위한 책을 만드는 '도서출판날자'의 대표입니다. 걱정이 많은 아들 예준이의 일상 에피소드로 「걱정이랑 친구할래?」를 펴낸 작가이기도 합니다. 발달장애인도 책을 읽을 권리가 있고, 그를 통해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희망으로 읽고, 듣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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