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가 그렇게 미안해요?
강지원 (푸르메재단 공동대표/ 어린이청소년포럼 대표)
학교숙제로 인터뷰를 요했던 대학생 몇 명이 찾아왔다. 첫 질문으로 대뜸 이런 질문을 했다. “평소 힘없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서 일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미안해서요!”
“예?”
“그래요. 미안해서요. 무슨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동안 수많은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아보았지만 이런 질문처럼 어려운 질문은 없다. 그리고 오래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래서 불쑥 나오는 대로 대답했다. 그 대답이 “미안해서요” 였다.
“무엇이 미안하신데요?” “미안하지 않습니까? 사람마다 경우는 다 다를 테지만, 예컨대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데, 좀 적은 분들을 보면 자신이 잘못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웬지 좀 미안해하고, 어떤 사람은 큰 감투를 쓰고 있는데, 그렇지 못한 분들을 보면 자신에게 무슨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좀 미안해하고, 뭐 그런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요?”
인터뷰를 마치고 학생들을 돌려보낸 뒤 잠시 생각해 보았다. ‘미안해하는 마음’, 그 정체는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네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을 가지게 할까. 맹자는 이런 예를 들었다.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놀라고 걱정하고 불쌍한 마음을 가진다고.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아이이지만, 그런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또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도 있다고 했다. 맹자는 나아가 측은지심(惻隱之心)에 대해서도 말한다. 슬퍼하고 걱정하는 마음이다. 4단(四端)중의 한가지인 측은지심은 일부 오해가 있는 것처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다. 사람들 누구에게나 있는 어진(仁) 본성의 극치이다. 인(仁)은 곧 사랑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마음을 타고 난다고 말한다.
▲ 사진작가 박종호 제공 (해피홈의 귀여운 아이들)
그런데 사람들은 곧잘 이런 자연스러운 마음들을 애써 몰라라 한다. 좀 더 큰집에 사는 사람들이 좀 더 작은 집에 사는 이들에게, 좀 더 큰 사무실을 쓰는 사람들이 좀 더 작은 사무실을 쓰는 이들에게, 좀 더 잘 나가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못나가는 이들에게....
또 있다. 좀 더 잘 생긴 사람들이 좀 더 못 생긴 이들에게, 좀 더 건강한 사람들이 병든 이들에게, 또 한창때의 중장년 인사들이 유약자나 노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들의 오만함, 조금이라도 더 누리는 사람들의 무감각함이 적지 아니하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의 또 다른 특성, 지배적 욕망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사는 모습이 모두 다르다. 돈만지기 좋아하는 사람, 권력쥐기 좋아하는 사람, 학문하기 좋아하는 사람, 농사짓기 좋아하는 사람 등등. 사람들은 이처럼 세상사는 모습이 모두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단순히 ‘차이’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온갖 교묘한 잣대를 만들어내 서열을 매기고 좀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한 사람들은 차례로 ‘차별’을 하려 한다.
그런가하면 사람들마다 가진 것 또한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가졌으나 건강을 가지지 못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장애를 가졌으나 학식을 많이 가진 것과 같다. 그래서 부디 가진 쪽에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덜 가진 쪽에 대해 오만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정당하고 적법하게 얻은 것이라 해도, 웬지 미안해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사람의 착한 본성이다. 존중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돕고자 하는 마음도 같다.
봉사하고 기부하는 것, 자신보다 낮은 곳을 향해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것은 바로 이런 착하고 어진 본성의 발로다. 곧 사랑의 발로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길이요, 자생(自生)하고 공생(共生)하는 길이다.
누구나 타고 나는 어질고 순수한 마음
이런 착하고 어진 본성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난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우러나오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조물주는 이미 모든 이들의 가슴에 사랑을 심어 놓았다. 그래서 사랑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조물주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런 탓으로 사랑은 공명(共鳴)을 한다. 내안의 사랑이 움직이면 타자안의 사랑도 반응을 한다.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면 그쪽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간혹 사랑을 전하는 방법이나 정도에 따라 크게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잔잔한 파문에 그쳤다면 그것은 방법이나 정도가 부족한 탓이다. 문제는 그 방법과 정도를 개발하고 정성을 다하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마다 사랑의 충만 정도가 모두 다르기도 하다. 어떤 이는 온 가슴이 사랑으로 충만해 그 넉넉함을 금세 느낄 수 있는가 하면 우리 같은 사람처럼 그렇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아니하다.
생각컨대 그것은 DNA에 따라 타고난 정도가 다른 결과일 수도 있고, 이 세상 살림살이가 너무나 험난해 타고난 본성에 구름이 끼이듯 어둡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사랑은 우리의 본래의 모습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잘 살리고 다듬고 개발하는 일은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몫이다.
▲ 사진작가 박종호 제공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이 보다 많이 갖고자 하는 것을 무조건 비난해서는 안된다. 건강, 학식, 재능, 재물, 지위 등등 그 어떤 것의 소유라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소유가 무엇을 위한 소유인가에 따라 그 값어치가 달라진다.
소유는 소유, 그 자체를 목표로 할 때 저급 가치로 전락한다. 끝없는 욕망의 연속으로 타락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유의 결과에 대해 오만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유가 그 어떤 고급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위치하고 그런 뜻에서 더 많이 갖고자 하는 목표가 되면 그 소유는 고급 가치로 승화한다. 탐욕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소유는 그 고급 목표에 의해 비로소 청순하게 부활을 하는 것이다.
그 목표중의 하나는 봉사하고 기부하는 것, 자신보다 낮은 곳을 향해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자기실현과 아울러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참된 성공, 참된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런 것들을 골똘히 생각해 보면 참된 소유란 무엇일까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건강, 학식, 재능, 재물, 지위 등의 훌륭한 소유에 대해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고급 목표를 위한 헌신에는 더욱 큰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런 소유자들은 오만하지 않는다. 그리고 보다 덜 가진 이들에 대해서 그냥 미안해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 모든 것들이 착하고 어진 마음, 사랑의 마음의 소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