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나누는 '할머니 선생님'
푸르메소셜팜 최은용 기부자 인터뷰
푸르메소셜팜에는 할머니 선생님이 있습니다. 질끈 동여맨 회색머리에 커다란 사각 뿔테안경으로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활기찬 발걸음으로 매주 3일씩 농장을 방문하는 분이죠. 멀리서부터 알아본 직원들은 “할머니 선생님이다, 저기 오신다!”며 소리 높여 반깁니다.
최은용 기부자가 진행하는 푸르메소셜팜의 방과 후 수업
오늘 교육문화동 2층 강당에 모인 직원 학생(이하 학생)은 총 6명. 테이블 위에 노트와 펜을 올려놓은 모습이 대학 강의실 풍경을 연상케 합니다. 빼빼로데이를 앞두고 선물로 가져온 빼빼로를 꺼낸 선생님은 뒤쪽에 나온 성분표를 주제로 수업을 시작합니다. 팜유 등 꽤 어려울 법한 단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합니다. 전날 방영한 <세계테마기행>에 나온 단어 ‘성수기’의 뜻과 한자어까지 알려주더니 ‘push’라는 단어로 영어 교육까지 일사천리로 끝냅니다.
월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최은용 기부자
한참 설명이 이어지는데 한 학생이 불쑥 전날 저녁에 있었던 ‘월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오! 월식 좋지. 어제 단체톡방에서도 얘기했었지? 지금 하던 얘기 끝내고 바로 월식에 대해 얘기해보자.”
한글에서 한자로, 영어로, 그리고 수학으로 과목을 넘나들고, 방송 프로그램과 마트 전단지나 카페 메뉴판, 단톡방의 대화까지 쉴 새 없이, 신속하게 옮겨가는 수업.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는 모든 것을 선생님은 놓치지 않고 교육의 소재로 활용합니다. 덕분에 학생들은 딴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할머니 선생님은 누구세요?
광명의 한 지역에서 30년 가까이 약국을 운영했던 최은용 기부자. 의약분업 당시 대부분의 약국이 병원 인근으로 이전할 때, 주민들을 두고 떠날 수 없어 오히려 병원을 그 지역으로 유치했을 만큼 애정을 듬뿍 쏟았던 곳이었습니다.
2층에 강당을 두고 수시로 학생들 대상으로 건강과 직업교육을 진행했고, 약을 파는 것보다 건강 상담을 해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던 약사 시절, 최은용 기부자는 “주민들과 친밀한 감정을 쌓으며 재밌게 일했다”고 그때를 추억합니다.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이지요.”
재개발로 지역 해체가 결정되고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약사 은퇴를 선언하고 여주에 터를 잡았습니다. “20년 이상 벌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부터는 제가 가진 것들을 나누며 살고 싶어요.”
푸르메소셜팜의 할머니 선생님이 된 이유
KBS '다큐온'에서 방영한 <꿈꾸는 농장>
건강 강연을 할 곳을 찾던 중 우연히 KBS 교양프로그램 다큐온에서 ‘행복한 농장’ 편을 보고 푸르메소셜팜을 알게 됐습니다. 곧바로 농장을 찾았고 이성혜 전 기획팀장의 안내로 업무 후 강당에서 탁구 치던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정말 공을 ‘치고만’ 있더라고요. 상대가 공을 치면 뛰어가서 받지 않고, 가만히 서서 공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보름간 매일 출근하며 코치했고 어느 순간 직원들이 공을 따라 뛰기 시작했습니다.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탁구만 하기엔 시간이 아까웠죠. 그보다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글자와 숫자 계산이 안 되는 직원들도 많았거든요.”
처음에 동화책으로 시도했지만 직원들은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직원들이 좋아하는 노래 가사는 어떨까? 다행히 조금씩 흥미를 보였습니다. 또 하루는 토마토, 버섯, 농장 등 일하면서 자주 듣는 단어 몇 개를 던져봤습니다. 그러자 너도나도 연관된 에피소드를 쏟아냈습니다. ‘유레카!’
할머니 선생님은 학생들이 보이는 관심을 놓치지 않습니다.
다음 과제는 학습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공부보다 노는 게 좋은 직원들은 의자에 앉는 걸 거부하고 바닥만 고집했습니다. 때마침 오픈한 카페 무이숲이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오픈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직원 부모들이 선생님과 대면한 후 자녀들을 수업에 참여하도록 한 것입니다.
글자와 간단한 숫자 계산은 물론, 배움에 대한 의지를 가진 학생들이 들어오면서 드디어 책상과 의자, 칠판을 갖춘 진짜 수업이 시작됐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재밌어요’‘신기해요’라고 얘기해주니 너무 행복하죠.”
마침 선생님 댁을 잠깐 방문한 종익 씨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평생 자녀의 재활치료를 동행해서 그런지 밖에서 잠깐만 들어도 아이가 집중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아요. 선생님 수업에는 진정성이 있어서 종익이를 포함해서 모두가 재밌어해요.”
즐겁게 수업을 듣고 있는 의혁 씨
수학이 너무 재밌어졌다는 의혁 씨는 “다른 데서 배울 때는 졸렸는데 할머니 선생님께 배우는 건 재밌다”며 “단톡방에서 선생님께서 띄어쓰기를 수정해주실 때마다 맞춤법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얘기합니다.
서로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봅니다
“뭐든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스스로 결정해야 그만큼 결과도 나오고 흥미를 계속 유지할 수 있지요.”
본인의 경험이자 오랜 시간 자녀부터 손자, 지역주민, 학생들을 가르쳐오면서 터득한 지혜입니다. 수업에 빠졌다가 다시 들어오는 직원들을 언제든 반갑게 맞아주는 것도, 한 명만 와도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 직원의 수준에 맞춘 수업을 할 수 있으니 오히려 좋지요.”
나누는 것은 자신이지만 얻은 것도 많답니다. “저에게도 ‘장애’는 새로운 세계였어요. 그 세계가 제 생각보다 넓고 깊더라고요. 이들과 함께하면서 제 세상도 그만큼 더 넓고 깊어졌죠.”
직원들의 세상을 열어주는 것은 최은용 기부자의 몫입니다. “장애가 있어서 영어나 한자를 배울 수 없다는 건 편견이에요. 저는 어려운 것도 가리지 않고 가르쳐주고 싶어요. <세계테마기행> 프로그램으로 수업을 하는 것도 더 넓은 세계를 알려주고 꿈을 크게 키워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은퇴랄 것이 없는 ‘약사’란 직업을 스스로 내려놓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주는 최은용 기부자. 그에게 나눔이란 “내 것을 적극적으로 차지하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 진심이 그대로 담긴 따뜻한 눈을 마주하면 도저히 이 할머니를 사랑하지 않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부가 싫다는 직원들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꾸역꾸역 수업에 들어오는 이유 역시 그 눈을, 그 안에 담긴 진심을 만나기 위해서일 겁니다.
소중한 인연들이 보내는 아낌없는 마음들이 부족해지지 않도록 푸르메는 더 열심히 나무를 심고 푸르게 키워가겠습니다.
*글, 사진= 지화정 대리 (커뮤니케이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