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부부의 쌍둥이 육아 1화] 크리스마스의 기적
영국에 살며 장애, 비장애 쌍둥이를 키우는 맞벌이 부부인 '나나'와 '자기'의 특별할 것 없는, 그러나 국내에서 만나보기 힘든 특별한 육아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영국의 선진적인 장애 복지 시스템을 알리고, 장애자녀를 키우는 모든 부모에게 위로와 공감을 건네는 나나 작가의 글은 매월 2회 업로드됩니다.
조용한 크리스마스 아침, 임신한 지 딱 27주차 6일째 되는 날이었다. 응급 제왕절개 수술이 결정되었고, 그날 우리의 쌍둥이 ‘해’와 ‘달’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해는 600g, 달이는 1kg. 둘이 합쳐도 신생아 평균 무게에 한참 못 미치는 작은 아이들이었지만 무사히 태어나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기적 같은 밤이었다.
“백질연화증이 의심됩니다.”
다음 날 오전, 첫 회진 시간이었다. 담당 의사가 달이의 뇌 초음파 스캔 후 신랑에게 건넨 말이었다. 뇌 사진에 희뿌연 연기가 덮여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일주일 안으로 이 흰색 부분이 없어질 수도 있지만, 경험상으로는 아무래도···."
백질연화증의 영어 병명은 PVL – Periventricular Leukomalacia. 길고 복잡하고 생소한 이 단어는 아마도 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백질연화증을 가지는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뇌병변 장애가 생깁니다. 지켜봐야겠지만요.”
신랑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하고 이성을 유지하는 신랑이었지만 그때는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 잠시 앉아 숨을 골랐다고.
뒤늦게 신랑으로부터 얘기를 전해 들은 그 날, 가장 긴 밤을 보냈다.
“그게 뭔데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왜 그런 거래요?”
“···한마디로 뇌손상이 있다는 거지···.”
막 수술한 몸으로 누워 꽤 오랫동안 인터넷을 검색했다. 백질연화증으로 검색을 하면 으레 따라붙는 연관검색어가 '뇌성마비'였다. 믿기지가 않았다.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백질연화증이라도 손상 정도에 따라서 그 예후가 천차만별이라고 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MRI 정밀검사 결과를 확인하는 날, 말 없이 사진을 보여주는 의사선생님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 더 말을 보태지 않아도 되겠죠?'라는 그 표정. 정말 그랬다. 사진 속 달이의 뇌 손상 정도는 비전문가인 내가 보아도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의사는 지체 장애 뿐 아니라 인지, 시력, 청력 장애도 동반할 수 있으니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사람이 죽기 전,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것처럼 지난 삶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했던가. 그 순간 내가 그랬다. 평범했던 어린 시절, 조금은 특별하고 싶어 선택한 대학생활, 남학생들과 부대끼며 보낸 공대 대학원 시절, 영국행, 이제야 간신히 구한 직장···.
다른 점이 있다면 미래의 삶도 눈앞에 펼쳐졌다는 것이다. 장애를 가진 불쌍한 내 아이.. 달이가 날 원망하면 어떡하지..직장을 잃겠지.. 아이 때문에 나라는 사람은 없어지겠지.. 내 삶은 끝났다.. 내가 돌봐야 하는 달이.. 내 아이...짐.. 아.. 나 왜 공부했지? .. 영국까지 왜 왔지?.. 아이를 일찍 가질걸… 나 때문일까...내가 뭘 잘못했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순간, 신랑의 말했다. “난 달이가 어떻게 커도 괜찮아. 걷지 못할 수도, 말을 못할 수도 있겠지. 엄마 아빠를 못 알아 볼 수도 있어. 그래도 최악의... 가장 최악의 상황을 먼저 생각하면 준비할 수 있어. 우리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자.”
그 후,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장애, 비장애 쌍둥이 엄마로 살아왔다. 삶은 생각만큼 끔찍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아니, 전혀 아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과는 다른 날들을 살아가고 있지만, 내 삶은 끝나지 않았고, 불쌍하지도 않다. 결론을 내리기엔 조금 이를 수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해와 달이가 우리 부부에게 기적처럼 온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것이다.
*글, 그림= 나나 작가 (@honey_nana_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