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록 기부자 2편] 아버지 뒤를 이은 나눔의 삶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권오록 기부자 2편
가까이서 들어본 권오록 기부자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한 마디로 ‘참 건강한 어르신’이라는 것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근력운동을 하고 사우나를 즐긴다. 조간신문도 꼭 읽는다. 여행을 좋아해서 국내외 여러 명승지를 안 가본 곳이 적은데, 관광버스를 타면 반드시 맨 앞자리에 앉고 여행하는 내내 한 번도 버스에서 졸지 않는다.
신종코로나 사태로 요즘은 국내 여행을 많이 다니는데 18년 된 자동차를 손수 몰고 경북 안동을 다녀오기도 하고 부인과 함께 울릉도를 다녀오기도 한다. 몇 년 몇 월에 누구랑 어디를 다녀왔는지 정확히 떠올릴 정도로 기억력도 대단하다. 시내에서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고, 무엇보다 걸음이 빠르다. 언젠가 행사 참석을 위해 함께 길을 나섰다가 뒤처지자 무심코 ‘할아버지, 같이 가요!’라고 외칠 뻔했다는 직원도 있었다.
“내가 가진 것은 사회가 준 것, 이웃과 나누는 것이 당연”
전후 혼란의 시대에 주위의 도움으로 대동상고(현 대동세무고)와 건국대를 졸업한 그는 1962년 5월 18일 서울시청에 주사보로 들어가 34년 동안 공무원으로 일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송파구 민원실장으로 올림픽 성공에 기여했다는 자부심도 강하다. 지시가 내려오기 전에 미리 준비하고 일처리가 빨라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1996년 6월 은평구청장으로 정년퇴직하기까지 녹조근정훈장과 홍조근정훈장을 받는 등 청렴하게 공직을 지켰다.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형편이 어려워 고통받는 시민을 많이 만났어요. 퇴직하고 여유가 생기면서 딱한 사람들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내가 가진 것을 그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그가 기부하는 자산의 상당 부분은 70년대 강남에 땅을 사둔 덕분에 형성된 것이다. 100평의 땅을 평당 2만 원에 샀는데 이후에 본격적인 강남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값이 크게 올랐다. “흙길로 자전거를 타고 신사동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서울시청으로 출근하던 시절이었지요. 운이 좋았어요. 내가 땀 흘려서 열심히 일한 결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랬다면 기부를 망설였을지 몰라요. 하하. 운이 좋아 큰돈이 생겼으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순리이지요.”
거액을 여러 번 내놓는 것을 두고 자녀들이 뭐라고 하지 않느냐고 묻자 “건강히 잘 키우고 교육도 충분히 했어요. 자기 앞가림은 알아서들 잘하고 있어요. 내가 결정해서 하는 일에 이렇다저렇다 말을 얹지 않아요. 뭐라고 한다고 내가 안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이들도 잘 알아요.”
돌아가신 아버지께 ‘착한 아들’ 칭찬 받고파
어려운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따뜻한 마음은 선친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의 고향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갈현리로 지금은 북한 땅이다. 1934년 부농의 집에서 1남 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마음 씀씀이가 넉넉한 분이셨다. 춘궁기가 오면 마을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교실 2개가 딸린 강습소도 차려서 글을 가르쳤다. 6·25전쟁이 터지자 가산을 거의 잃고 평택으로 피란을 내려왔는데, 건초와 땔감을 모아 내다 팔 정도로 어려운 시절에도 주위 사람들을 보살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저희한테 ‘남을 도와야 한다’고 훈계하신 적이 없어요. 그저 이웃을 돕는 삶을 사시면서 행동으로 우리를 가르치셨을 뿐이지요. 그런데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아요. 내가 나누는 삶을 사는 것도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본받으려는 노력일 겁니다. 이 다음에 아버지를 만나면 ‘우리 오록이가 아주 착하게 잘 살았구나’ 하고 칭찬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아버지 앞에서 당당하려고 선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착한 아들이자 내가 얻은 모든 것이 실은 사회로부터 왔다는 믿음으로 아낌없이 나누는 멋진 어르신이다. 우리 모두의 ‘사랑스러운 할아버지’ 권오록 기부자. 그 반듯한 태도, 따뜻한 마음, 나눔의 의지를 잘 배우고 소중하게 간직할 것이다.
*글= 정태영 대외협력실장
*사진= 푸르메재단 DB, 조선일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