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아름다워 포기할 수 없던 꿈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소설가 박완서 1편


 


“안녕하세요. 제 별명이 박완서 동생입니다. 조금 큰 앞니와 아래로 처진 눈매 때문에 선한 인상과 따뜻한 미소를 지니신 선생님을 제가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글이 필요합니다.”


2005년 여름, 내가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께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그해 봄 출범한 푸르메재단은 첫 번째 사업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따뜻한 책을 출간하기로 계획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을 겪게 된다. 그것이 인생의 잔가지 몇 개를 부러뜨리고 지나가는 소슬바람이면 다행이지만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는 거대한 태풍이라면?



따뜻한 봄날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심한 몸살을 앓는 건 참을만한 불운이다. 하지만 행복한 퇴근길, 신호등을 무시하고 달려온 자동차에 치여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된다면 ‘왜 하필 나에게 왜 이런 불행이...’ 하고 하늘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 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것’이라고 누군가 등을 토닥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때 박완서 선생님이 생각났다. 불혹(不惑)에 등단해 70대 중반에도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가는 노(老)소설가. 육이오 전쟁의 참화(慘禍) 속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차례로 잃고, 이후 남편마저 암으로 보낸 뒤 불과 석 달 만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을 잃는 참척(慘慽)의 고통을 당하셨으니 불행에 대해 누구보다 확실한 대답을 주실 것 같았다.


선생님은 그때의 일을 두고 ‘우린 남들이 부러워한 금슬 좋은 부부였고 나는 전적으로 남편에게 의존적이었다. 혼자서 살 자신도 없었다. 극도의 무력감은 슬픔보다 더 나빴다. 남편의 영정을 머리맡에 두고 “여보 나 좀 데려가 줘요”하는 소리만 주문처럼 외고 살았다. 그런 데 석 달 만에 남편이 데려간 것은 내가 아니라 아들이었다. 이럴 리가 없다. 제발 꿈이어라. 방을 헤매며 온 몸을 부딪히는 난동을 부려 보았지만 악몽은 깨어나지 않았다. 나도 아들 곁으로 데려다 달라는 내 절규는 하느님의 견고한 침묵의 변죽도 울리지 못했다.’고 쓰셨다.



그런 고통을 경험하신 박완서 선생님이라면 땅바닥에 주저앉은 이에게 다가와 따뜻하게 안아주며 “우리에게 왜 이런 불행이 일어났을까”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런 불행이 일어날 수 있어요”하고 위로해 주실 것 같았다. 어떻게 원고를 부탁드릴까 고민하다 결국 ‘저는 선생님을 닮아 가끔 박완서 동생이 아니냐는 말을 듣는다.’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메일을 보냈다. 가장 고통스럽고 어려웠던 순간, 하지만 너무 젊은 시절이어서 포기할 수 없었던 그 마음을 글로 담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들과 같은 나이지만 박완서 동생이라고 자처하는 나를 귀엽게 보신 것일까? 선생님은 “기꺼이 글을 써주겠다”는 답장을 주셨다. 그리고 한 달 뒤 아흔 살의 당신 어머니가 임종을 맞을 때 고향 집에서 일하던 머슴 ‘호뱅이’를 찾으셨다는 <엄마의 마지막 유머>라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글을 보내주셨다. 박완서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뵐 때마다 선생님은 큰 누님처럼 당신의 고향 집 풍경, 어린 시절, 그리고 삶의 지혜가 담긴 말씀을 들려주셨다. 2007년 여름이었다. 삼 십 삼 도가 넘는 폭염을 뚫고 사무실을 찾아오신 선생님을 모시고 식당을 찾았다. 선생님은 애주가답게 자리에 앉자마자 “더운데 목부터 축이자!”고 제안하셨다.


선생님은 연거푸 맥주 두 잔을 들이키신 뒤 <토지>를 화제로 말문을 여셨다. “박경리 선생님이 사시던 원주집에서는 비닐 한 조각 나오지 않았어요. 우리 민족와 국토에 대한 사랑을 글뿐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신 거지요. 박 선생님이 쓰신 <토지>가 바로 우리 민족이고 <토지>를 통해 자연의 소중함을 노래하신 겁니다.”


고(故) 박완서 선생님, 이지선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와 함께
고(故) 박완서 선생님, 이지선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와 함께

박완서 선생님에게 평생의 화두(話頭)는 무엇이었을까. “어머니와 나는 피난 나갈 기회를 놓쳤어요.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낮에는 민주주의가 되고 밤에는 사회주의가 되는 세상을 경험했지요.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변해가는지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목숨을 음식 한 조각 앞에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게 몰락해 가는지 목격하셨다.


그런 아픈 기억과 경험들이 박완서 선생님에게 이념의 덧없음을, 그리고 불행으로 인한 상처는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끌어안고 사랑함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선사했던 것일까? 유년 시절, 장맛비로 마을 앞 냇물에 놓인 다리조차 떠내려가고 서울로 돌아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 머슴 호뱅이가 갑자기 나타나 당신을 지게에 떡하니 태우고 탁류를 헤쳐나갔던 아름다운 기억 같은 것 말이다.


*글=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사진= 푸르메재단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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