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보험의 주체는 '태아'다
하성찬·임사라 부부 기부자·
“4년간 소송하며 몸도 마음도 참 힘들었지만 힘든 현실 속에서 장애자녀를 키우는 많은 부모를 위해 힘을 냈습니다. 돈이 없어 아이를 치료할 수 없는 가족들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최근 긴 소송 끝에 힘겹게 받아낸 딸 예희의 장애진단보험금 중 일부를 푸르메재단에 전달한 남편 하성찬 씨와 아내 임사라 씨. 2015년에 받은 의료소송 합의금 기부를 시작으로 벌써 9번째입니다. 기부금 총액만도 5000만 원을 훌쩍 넘습니다.
부부는 예희를 가졌다는 얘기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그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혹시 모를 작은 위험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태아보험을 들었지만,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라 씨가 진통하던 중 마땅히 대기하고 있어야 할 의사는 자리를 비웠고 오랜 시간 산도에 끼어있던 아이를 간호사가 무리하게 꺼내며 예희는 뇌 손상을 입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으로 품에 안은 아이는 작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스스로 몸을 가눌 수도 없고 의사 표현도 할 수 없던 예희. 경기와 호흡곤란으로 수차례 병원을 오가며 크고 작은 비용이 끊임없이 들었습니다. 부담되는 비용이었지만 미리 준비한 보험이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문제가 생긴 건 예희가 장애등급을 받고 보험금을 청구한 시점이었습니다. *장애등급제 2019년 폐지
영구장해진단을 받아 장애진단보험금이 발생하자, 보험회사는 “분만 중인 태아는 상해보험의 피보험자가 될 수 없으니 자신들에게 보상책임이 없다”며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습니다. 거기에 그동안 지급한 약 1,000만 원의 보험금도 연 이자 20%를 더해 돌려달라는 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보험사 요구대로 돈을 돌려주는 것이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더 나은 선택이었을 거예요. 직장에 다니면서 소송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 데다, 부모님 도움도 있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부부는 소송을 선택했습니다. 소중한 아이들을 두고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는 보험사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힘든 상황 속에 눈물을 흘리며 치료를 포기하는 부모를 너무 많이 봐왔기에 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소송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주변에서 다들 말렸어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친하게 지내던 대형 로펌 변호사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며 손사래를 쳤어요.”
연락을 돌리고 거절당하기를 수차례, 드디어 한 변호사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송도인 변호사였습니다.
“함께 해보자는 말씀만으로도 참 감사했는데 만반의 준비를 갖춰 1차 재판을 승소로 이끌어주셨어요. 부분 승소도 아닌 100% 승소였지요. 보험사에서 보험금을 전액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어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패소한 보험사는 즉시 항소했습니다. 그들에게도 수백억 원, 어쩌면 그 이상이 걸려 있는 중요한 재판. 하지만 2차 법원도 대법원도 모두 성찬 씨 부부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비슷한 유형의 사건들에 같은 효력을 미치는 대법원의 승소 판결로 보험사들은 태아가 피보험자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보험금 지급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법원 2016다211224)
전국의 수많은 예희 부모에게 희망을 선물한 아름다운 승리였습니다.
부부는 어려운 상황에서 치료를 받는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의 장애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며 예희의 장애진단 보험금 중 일부를 내놓았습니다.
“재활치료를 하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수 있는 아이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못 받는 일은 이제 없었으면 좋겠어요. 중도장애라도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개선될 수 있다면 부모로서는 더 바랄 게 없을 거예요.”
성찬 씨는 여전히 예희만 생각하면 눈물이 차오릅니다. 불행한 사고로 아프게 태어난 딸에게 미안한 만큼 고마운 마음도 참 큽니다.
“제 삶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켰어요.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주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둘러볼 수 있게 해줬지요.”
온전히 자신만 바라보는 아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눠주는 서로가 있어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잘 지나온 성찬 씨와 사라 씨.
자신의 고통을 삭이며 더 아픈 사람을 돌아보는 마음의 깊이를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기꺼이 맞서 싸우며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부부의 뜻 있는 목소리에 푸르메재단이 늘 함께하겠습니다.
*글= 지화정 간사 (커뮤니케이션팀)
*사진= 지화정 간사, 푸르메재단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