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가 기부하는 재단

백경학 상임이사의 미국 연수기 3편 <밸리어린이병원재단>


 


“우리 재단의 내년 예산은 1650만달러(약 198억원)입니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어린이들이 신는 특별한 신발이나 보조기기 등을 지원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금은 모두 지역사회로부터 나옵니다.”


샌프란스시코에서 320킬로미터 떨어진 내륙도시 프레즈노의 밸리어린이병원재단((Valley Children’s Healthcare Foundation, 이하 밸리재단)의 노아 허바드(Noah Hubbabard) 과장은 재단의 사업을 묻자 이같이 대답했다. 미국에서 의료비가 가장 비싼 어린이 재활치료비는 보험사에서 지불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이런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밸리재단은 다양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재단 건물 모습
재단 건물 모습

현재 병원을 후원하는 중심축은 어머니 길드(후원회). 밸리 병원의 역사는 후원회의 역사다. 1949년 5명의 어머니(Five Mother)가 조직한 후원회가 병원 건립의 마중물이 됐다. 첫 어머니였던 아그네스 크로켓(Agnes Crocket) 여사가 어린이병원 건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당시 큰 기금인 5,477달러(당시 1달러는 현재 50달러의 가치, 약 3억 3,000만원)를 기부하자, 다른 4명의 어머니와 시민들이 32만 5,000달러를 모금했다. 이에 호응해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한 농장주가 7만평의 땅을 기부하면서 기적의 병원이 세워졌다.


5명의 어머니가 만든 후원회가 지역사회로 발전


지금은 병원을 지원하는 16개 후원회가 활동 중이라고 한다. 이런 전통은 3년 전 밸리재단이 병원에서 독립하면서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병원후원을 위한 모금 행사를 독자적으로 주도하고 있다. 재단 사업은 크게 6가지.


1. 고액후원자

대평원인 중부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대농장과 자수성가한 지역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다. 매년 1만달러(약 1,200만원) 이상을 기부하는 농장주와 기업가들이 고액후원자로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전체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00만 달러(60억원) 이상을 후원한다.


2. ‘어린이날의 기적’ 캠페인

11월 20일 <세계어린이 날>을 맞아 미국 전역에서 벌이는 모금 행사에 160개 어린이병원(병원 재단)과 광고를 전문으로 하는 비영리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CNN과 CBS, 타임지 등 전국 네브워크 방송과 주요 잡지에 어린이 보호의 필요성을 알리는 기획광고를 한다. 광고는 미 전역에 방송되는 슈퍼볼 경기나 고속도로의 대형광고판 등을 이용한다. 모금된 기금 중 광고료와 수수료를 제외하고 각 병원과 재단으로 배분된다.


5명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린 병원 로비
5명 어머니의 초상화가 걸린 병원 로비

프레즈노 지역신문과 벌이는 모금캠페인도 주목할 만하다. 지역신문은 <어린이 날>을 맞아 밸리어린이병원 특집기사를 싣는다. 자원봉사자들은 이날 신문을 들고 거리를 누비며 시민들로부터 50~100달러의 기부를 받는다고 한다. 모금담당인 마랄 키스메티안(Maral Kismetian) 씨는 “긴급한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사연부터 기적적으로 회복된 감동적인 사례가 1면부터 다양하게 실리기 때문에 지역주민의 참여가 높다.”고 강조한다.


3. 후원의 날 행사

재단에서는 매년 9월이 되면 지역주민을 초대해 성대한 디너파티를 주최한다. 지역 은행지점과 대형 슈퍼 등은 후원사로 참여한다. 지난해 행사에는 900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이날 디너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한 정장을 준비하는데 이날 하루 동안 100만달러(약 10억원)가 모금된다고 한다.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에 허바드 씨는 “파티에 참가하는 것 자체가 내가 중요한 존재라는 자부심과 함께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30년째 이어지고 있는 이 행사는 전에는 호텔 등 좋은 장소에서 비싼 음식을 먹었지만 3년 전부터 어린이병원 뒤뜰에서 개최한다. 참가자들은 병원을 직접 둘러보고 어떤 시설과 치료기금이 필요한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해를 거듭할수록 참가자와 기금이 늘고 있다.


허바드 씨와 키스메티안 씨
허바드 씨와 키스메티안 씨

카드 결제 시 재단 후원금을 합산하는 시스템 개발


4.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캠페인

재단에서 가장 공을 들이는 사업은 카드 결제 시 기부금을 합산하도록 하는 것. 코스트코 같은 대형 슈퍼마켓이나 식당에서 결제할 때 영수증에 재단후원금 항목을 넣어 같이 결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식사비가 28달러면 그 아래 칸에 병원 재단 기부금 2달러 써넣어 고객들이 30달러에 사인하도록 유도한다는 것.


나도 15년 동안 푸르메재단 일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기부를 권유하고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밥이나 술은 매달 사겠지만 기부는 안하겠다는 지인을 만날 때 난감하다. 잘 설득해서 약정서를 쓴 경우가 많지만 끝내 거절할 경우, 관계가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르메재단을 기부하는 분들은 언론이나 지인 소개를 받아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부하는 동기를 보면 크게 여섯 가지로 나눠어진다.


첫째, 너무 안타깝고 감동적인 사연을 접해 마음이 움직인 경우, 두 번째 내가 하는 기부가 꼭 필요한 일에 쓰이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공감하는 경우, 세 번째 사회적으로 존경받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기부한 경우, 네 번째, 기부하면서 세인의 주목을 받기 원할 경우, 다섯 번째 기부를 요청한 개인이나 단체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경우, 마지막으로 세금으로 낼 바에는 차라리 좋은 일을 하겠다고 판단하는 경우 등이다.


물론 한 가지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동기가 결합돼 결국 기부를 결단하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권유에 이기지 못하는 경우 기부가 계속 이어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부는 어려운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점에서 꼭 필요한 선행임에 분명하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어려운 사람뿐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정화되고 스스로 더 큰 위안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재단 사무실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재단 사무실에서 인터뷰하는 모습

밸리재단은 프레즈노가 인구 50만 명의 중소도시라는 장점을 살려 지역공동체에 맞는 여러 가지 기부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친지들로부터 생일선물을 받는 대신 기부금으로 대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먹고 즐기는 파티를 간소화하고 선물비로 모아진 기금은 재단에 기부돼 특정 목적사업을 위해 쓰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유산기부 약정자 미리 기부벽에 새겨


5. 유산기부

밸리재단에서는 유산기부를 약정할 경우, 살아생전에 병원 기부벽이나 병원 내 시설에 약정자의 이름을 미리 새겨준다고 한다. 약정자와 가족이 가능한 한 기부 약속을 지킨다는 점에서 유산기부가 활성화되는 효과가 있다. 유산기부 비율이 너무 높을 경우, 가족과의 분쟁으로 파기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보통 유산의 10% 정도를 약정받고 있다고 한다. 살아서 미리 지역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사후에는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아이디어인 것 같다.


6. 자원봉사

밸리어린이병원에서 특화된 것 중 하나가 다양한 자원봉사 프로그램. 2년 전 병원을 방문했을 때 보이스카웃 단원 청소년들이 병원에 입원해 휠체어를 타는 어린이들과 농구와 배구, 암벽 등반을 함께 할 뿐 아니라 또래의 고민을 들어주는 ‘친구 되어주기’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휠체어를 타는 소년은 퇴원 후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아와 학업이 중단된 어린이들의 공부를 도와준다고 한다. 장차 기부자가 될 청소년을 병원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재단 직원은 모두 17명. 지역사회와 어떻게 다양한 캠페인을 통해 모금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3년 전 병원으로부터 독립했다고 한다. 보통 때는 후원자들에게 감사와 기부증액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는 일상업무를 하다 정기적인 행사에 모두 투입된다고 한다. 지역사회의 지원에 힘입어 프레즈노에 본부를 둔 밸리어린이병원과 산하에 있는 다른 병원과 센터는 지난해 6억 9,200만달러(약 8,300억원)의 운영비로 쓰고도 1억 800만달러(약 1,296억원)의 흑자가 났다.


’미국에서 부자는 병원‘이라는 농담을 이해할 것 같다. “부유한 병원을 위해 왜 그렇게 열심히 모금하느냐”는 질문에 허바드 씨와 키스메티안 씨는 “그게 재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사명이자 숙명”이라고 대답한다.


병원로비에 있는 기부벽
병원 로비에 있는 기부벽

병원 로비에 초상화로 걸려 있는 5명 어머니의 정신이 연면히 이어지며 후대 발복하고 있기 때문일까. 밸리어린이병원과 재단 그리고 프레즈노 지역주민 모두가 어린이를 중심에 둔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사진=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스마트팜 캠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