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들으면 진실합니다”
한혜인 기부자
스물아홉 살, 7년차 직장인 한혜인 씨는 누구와도 손발이 척척 맞는 직원으로 통합니다. 전자 제품을 생산하는 최대 규모의 장애인 복지시설이자 사회적기업인 ‘정립전자’에서 7년 동안 다져온 호흡. 휠체어를 탄 동료가 말을 건네자 입모양을 보고는 바로 간단한 단어로 의사를 표현합니다. 청각장애인 혜인 씨가 소통하는 방법입니다.
말의 빈자리를 채우는 표정과 손짓, 눈빛
혜인 씨는 손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수화’와 상대방의 입모양을 보고 말뜻을 이해해 목소리를 내는 ‘구화’를 할 수 있습니다. 매번 주어진 환경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소통 방식도 그때그때마다 달라집니다. 푸르메재단과의 인터뷰는 노트북으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쓰는 필담과 구화로 진행됐습니다.
LED 조명부터 휴대폰 거치대까지 혜인 씨가 만드는 제품은 다양합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작업라인에서 화장실 비데 컨트롤 패널의 조립 상태를 확인하고 컴퓨터로 부품에 소프트웨어를 탑재하는 작업을 이어갑니다. 말이 필요 없는 작업, 혜인 씨는 능숙한 솜씨로 해냅니다. “제 손으로 조립한 제품이 완성되었을 때 가장 뿌듯해요!”
김종철 제조부 팀장은 혜인 씨가 ‘보배 같은 동료’라며 업무 능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굉장히 성실하고 집중력이 강한 편이에요. 어떤 업무를 맡겨도 오류를 내는 경우가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소화합니다.” 엄지를 치켜든 김종철 팀장의 손 모양과 입 모양을 살피던 혜인 씨가 “네, 하하하”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어릴 때 뇌수막염을 앓고 청각장애를 갖게 된 혜인 씨는 달팽이관에 소리 정보를 전달하는 전극을 심는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한 뒤, 왼쪽 귀로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세상의 소리를 들었을 때 기쁨보다는 놀라움이 컸습니다. “귀에 찬 기계와 인공 신경이 연결된 상태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너무 놀라서 울었던 기억밖에 없어요.”
엄마 전계자 씨는 또래보다 발달이 늦어 걸음도 늦게 뗀 딸이 지금은 어려움 없이 제 몫을 다해내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성격이 밝고 웃기도 잘 웃고 심성이 정말 착해요. 한 직장에 묵묵히 다니는 것도 기특해요. 약삭빠르지는 못해요(웃음). 제 딸이라 부족한 부분도 보이지만 주변에서 칭찬을 많이 해주시니까 그래도 잘 자라준 것 같아 고마워요.”
나누면 기쁨도 두 배
입사 다음 해에 생애 첫 기부를 신청했습니다. “제가 번 돈으로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돕고 싶었어요.” 그때가 2014년 8월. 평소 장애자녀의 부모들과 활동하며 푸르메재단에 관심이 많았던 엄마가 국내 하나뿐인 어린이재활병원 소식을 알려줬습니다. 혜인 씨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푸르메재단을 선택했습니다. “기부자들이 많아져서 장애어린이들이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다면 보람될 것 같았어요.”
재활치료의 지난한 과정을 겪어봤기 때문에 마음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언어치료 등 재활을 받았던 터라 병원은 익숙한 곳이에요. 수술을 한 뒤로는 복지관 언어치료와 병원 청력검사 정도로 줄었지만, 치료를 받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 알아요. 어린이들한테 말해주고 싶어요. 잘하고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힘내라고요.”
매달 월급의 일부를 나눈다는 의미에 대해 묻자,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자판을 두드립니다. “내가 받은 만큼 다른 이들에게도 혜택을 되돌려 주는 거예요. 그래서 주고받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것이지요.”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느끼며 남들처럼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이 순간. 자신이 받은 ‘최고의 선물’과도 같습니다. 요즘 부쩍 그 사랑이 크게 다가온다는 혜인 씨.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 고생하시지 않게 해드리고 싶어요.”
삶이 행복해지는 일들
푸르메재단 리플릿에 나온 푸르메스마트팜 건립 캠페인을 보자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외할머니 일손을 도왔던 경험을 펼쳐놓습니다. “감자며 고추며 농작물을 직접 심어보고 수확해봤는데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몸이 정말 고됐던 만큼 보람을 얻긴 했지만요(웃음).”
혜인 씨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주말마다 카페를 탐방하며 맛있는 커피 마시기. 어느새 가슴에 품게 된 바리스타의 꿈을 꼭 이루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장애인들의 일자리 선택의 폭이 넓어지길 희망”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직업으로 연결되고 행복한 삶을 위한 튼튼한 토대가 되어주는 것. 자신뿐만 아니라 장애를 가진 동료들도 누리길 바란답니다.
혜인 씨는 퇴근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친구들도 만나야 하고, 하루 2만보씩 걷기는 물론 탁구, 배드민턴, 수영, 에어로빅 등 운동에 푹 빠졌기 때문입니다. 서른을 앞두고 홀로 여행도 떠나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습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어요. 서로 소통이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으면 진실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는 혜인 씨. 몇 분 동안 문장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며 한 글자씩 써내려간 끝에 ‘다 됐다’며 화면을 보여줍니다. “할 수 있는 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지금 정말 기쁘거든요!”
*글, 사진= 정담빈 대리 (커뮤니케이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