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도시인 치유하는 그곳
네덜란드 선진농업 연수 ; 후버 클라인 마리엔달(Hoeve Klein Mariendaal) 농장
알프스에서 발원한 라인강(Rhein)은 스위스 바젤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를 지나며 조금씩 강폭이 넓어지지만 독일 서부 마인츠 인근 로렐라이 언덕을 거치면서 장강의 웅장한 면모를 드러낸다. 유럽의 중앙을 관통하며 1300킬로미터를 달려온 거대한 강줄기는 네덜란드의 드넓은 평야지대에 접어들면서 레인(rijn)이란 이름으로 두 줄기로 갈라진다. 북쪽을 향한 강물이 위트레히트와 로테르담을 거쳐 북해로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곳이 바로 아른헴(Arnhem)이다. 아른헴은 레인강의 중세부터 조선업과 직물업으로 번창한 무역중심지로 현재 네덜란드의 국가성장을 견인하는 전자와 화학단지로 구성돼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남동쪽을 향해 100km를 달려온 승용차가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언덕 위에 뾰족지붕을 가진 예쁜 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른헴의 신시가지였다. 파란 하늘아래 붉은 벽돌집들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구불구불 휘어진 길을 따라 구릉 위에 올라서자 좁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지나자 ‘개 출입금지’라는 큼지막한 푯말과 함께 <Hoeve Klein Mariendaal>, ‘마리엔달의 작은 농장’을 알리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농업분야에 있어 세계적인 권위의 네덜란드 와게닝겐(Wageningen) 대학 얀 하싱크(Jan Hassink) 박사가 세운 치유농장 마리엔달 케어팜(Care Farm)이다. 2007년 건립돼 정신적,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치매환자들에게 농사 체험 및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하싱크 박사는 농촌진흥청이 우리나라에서 치유농장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펴낸 <네덜란드 치유농업 총서 6권>의 공동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마중 나온 하싱크 박사를 따라 목조건물 2층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마리엔달의 현황과 네덜란드 치유농업의 미래를 들어봤다.
그에게 먼저 농장을 세우게 된 배경을 물었다. “상처받은 도시인들이 멀지 않은 농촌에서 치유 받을 수 있는 방안으로 도시형 케어팜(Care Farm)을 구상하게 됐다”며 “자연친화적인 환경에서 편안한 일을 하면서 스스로 안정감과 자존감을 가지는 것이 케어의 목표”라고 강조했다.
하싱크 박사는 2007년 와게닝겐 대학에서 18km 떨어진 아른헴을 농장지역으로 선택한 뒤 당시 환경단체가 소유하고 있는 1만평 부지에 마리엔달 농장을 열었다. 농장 시설이 모두 낡아 리모델링한 필요가 있었는데 ‘Green Activity’ 라는 시민단체와 함께 모금 행사를 벌인 결과, 100만 유로(약 13억원)를 모아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농장을 찾는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2014년 40만 유로(약 5억2000만원)를 다시 모금해 현재 사무실과 회의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2층 목조건물을 새로 지었다.
보통 고객이라면 상점이나 은행,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는 손님을 생각했는데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환자보다는 비용을 지불하는 ‘이용객’이나 ‘고객’이란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았다.
이곳을 찾는 환자는 하루 평균 20~25명으로 지적장애인과 치매환자가 가장 많고 정신질환자, 뇌손상환자, 장기실업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도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돌본다고 한다. 우리가 환자(Patent)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하싱크 박사는 “이곳에서는 환자라는 단어 대신 이용객이나 고객을 의미하는 ‘클라이엔트(Client)’를 사용하고 있다”며 “치료 및 치유 대상이 아니라 농장에서 제공한 사회 서비스를 받은 이용객으로 이해해 달라”고 강조했다.
재단법인으로 출발한 농장은 전직 시의원과 재무 컨설턴트, 환경담당 전직 공무원, 국립공원 직원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이사로 참여해 측면에서 운영을 돕고 있다. 10명의 직원은 농업과 원예, 농물사육 등 분야별로 담당하며 대학생과 사회복지전문, 지역주민으로 구성된 자원봉사자 40명이 요리, 음악, 미술, 치매 돌봄, 정원 가꾸기 등 프로그램별로 참여한다.
이용객이 농장에서 정서적인 안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지방정부에 케어를 신청을 할 수 있다. 의사소견서를 가지고 우리의 구청이나 군청의 사회복지담당 직원을 찾아가면 그가 판단해 치유농장을 배정한다고 한다. 이용료는 반나절에 35유로(약 4만5000원). 지방정부에서 직접 농장에 지불한다. 건강 및 교육 분야 프로그램비로 우리 정부가 저소득층 어린이를 위해 부담하고 있는 바우처 제도와 유사한 방식이다. 네덜란드의 케어제도는 치료가 아니라 농장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능을 회복해 사회로 복귀하거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을 목표로 한다.
농장 안에 소와 양, 토끼를 키울 수 있는 작은 축사가 마련돼 있다. 말이 보이지 않아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낮에는 이용객들이 들판으로 데리고 나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동물을 보살피면서 치유되는 동물교감이 케어팜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라는 것이다. 농장을 둘러보는데 한 청년이 닭장 안에서 닭을 안고 있다. 봉사자인가 궁금했는데 지적장애를 가진 청년이란다. 그가 매일 농장에 나와 동물에게 먹이를 주고 돌보면서 정서적 안정을 찾는다는 얘기를 듣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농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일하는 농부들’처럼 묵묵히 밭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뙤약볕 속에 땀을 흘리며 모두 열심이다. 다가가보니 쇠스랑으로 잡초를 제거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힘든 농사일이 가장 인기라고 한다. 하싱크 박사는 이유에 대해 “농사일을 하면서 스스로 아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존재이고 일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밭일을 했지만, 나이가 들고 점점 중증이 되면서 이곳을 찾는 70명의 이용객 중 10명 정도만 밭일을 한다. 이용객이 줄면서 개간된 밭도 조금씩 잡초밭으로 변해간다.
채소 및 화훼 가꾸기 등 농사뿐 아니라 요리, 요리, 음악, 미술 프로그램에는 직원 1명과 자원봉사자 2명이 이용객 7명을 돌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최근에는 동물 돌보기와 정원가꾸기가 인기라고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표정이 밝다. 맑은 하늘 아래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누가 봐도 행복하게 보일 것 같다. 갈대로 지붕을 이은 전통적인 농가 앞에서 노인 2명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자신을 야브 담(Jaap Dam)이라고 소개한 한 노인이 미술시간에 그린 송어그림을 자랑스럽게 펼쳐 보인다. 그는 치매를 앓고 있는데 농장에 온 이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즐겁게 생활한다고 한다.
이용객은 원하는 농장에서 2주간 적응기간을 거친 뒤 3개월 단위로 케어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 뒤 효과가 있다고 판단하면 기간을 연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적응기간 동안 문제를 일으키거나 농장에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할 경우, 이용객을 거부할 수도 있다고 한다. 농장에는 환자와 치매노인 뿐 아니라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비행을 저지른 청소년들이 주말 농장에서 지내는 스테이(Stay)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농장 당 1명이 배정돼 1년 동안 변화를 살펴본다고 한다.
이용객들은 출퇴근을 어떻게 할까? 처음에는 자원봉사자 2명이 셔틀버스를 운전해 이용객들의 출퇴근을 도왔지만 지금은 가족들이 승용차로 데려다주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집에서 농장까지 멀지 않을 경우 콜택시를 이용할 수 있는데 이 비용 역시 지자체가 부담하고 있다.
갑자기 농장 앞마당이 시끄럽다. 들판에서 오전 일과를 끝내고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트랙터에 매달린 수레에는 잡초가 가득하다. 밭일을 좋아하는 이용객중 2명이 트랙터를 운전한다고 한다. 누가 직원이고 누가 이용객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모두 땀 흘려 함께 일하면 됐지, 누군지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 케어팜의 장점일 것이다. 자원봉사를 하러왔다가 이용객들과 일하는 것이 좋아 직원으로 눌러 앉은 사람도 있단다.
농기구와 잡초를 옮기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겨울에 쓸 장작을 패는 일을 한단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흔쾌히 포즈를 취한다. 얼굴에 행복감이 넘친다.
치유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의사의 소견서가 필수적이다. 네덜란드에서 치매환자나 중증장애인을 병원이나 치료센터가 아닌 농장에서 관리하기로 결정했을 때 의료계의 반발이 없었을까? 당연히 적지 않은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환자가 꼭 의학적인 치료나 처방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도 나아질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작용했다고 한다. 1990년대 초 농업개방과 세계화로 꽃과 토마토 같은 화훼특용작물을 재배하는 네덜란드 농가에 위기가 닥쳤다. 네덜란드 경제의 근간이 된 농가가 몰락하면 국가경제가 침체된다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케어정책을 결정하는 정부책임자 뿐 아니라 네덜란드 여왕이 직접 마리엔달 농장을 방문해 힘을 실어준 것도 케어팜을 둘러싼 논쟁을 잠재우는 데 기여했다. 결국 이해당사자 모두가 한발 양보한 결과 케어팜이 탄생했다.
케어팜은 말 그대로 장애인이나 환자를 돌보는 케어(Care)와 농장의 팜(Farm)이 결합된 단어이다. 농가 중 간호지식이나 경력이 있는 여성들이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대신 환자와 장애인을 보호하는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도록 역할을 부여했다.
1997년 75개에 불과하던 케어팜은 2018년 현재 1100개로 늘어났고 하루 2만 명이 이용하는 거대한 산업이 됐다. 네덜란드 정부는 1997년 치유농장을 지원하기위한 지원센터를 개설해 케어팜으로 전화하는 것을 지원했다. 2003년에는 정부 예산을 증액했으며 농장주가 이용객과 직접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했다. 2005년에는 이용객이 장기간 치유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2015년 전국치유농업협회(The Federation of care Farm)를 설립해 국가인증제도를 도입하는 대신 구체적인 관리와 운영은 지방자치정부로 이관했다. 케어팜은 네덜란드 정부에서 도입한지 30년 만에 사회적 농업의 대안이 되고 있다.
농장은 환자를 돌보며 소득을 얻고, 이용객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감을 느낀다. 말 그대로 모두가 행복한 제도이다.
마리엔달 농장의 연간 운영비는 얼마나 될까. 2017년을 기준으로 약 60만 유로. 우리 돈으로 7억 8만원이다. 이중 66%인 40만 유로는 이용객들의 바우처 비용(40만 유로)으로 지방정부가 부담한다. 농장 설립초기만 해도 이용료 수입이 80%를 넘었지만 조금씩 줄어들면서 하싱크 박사의 근심도 깊어지고 있다. 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다양한 수익사업을 벌인다고 한다. 그 중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임대수입. 마을사람들은 생일잔치나 모임 때 마리엔달 농장의 회의실과 레스토랑을 빌려서 이용한다. 임대수입액은 지난해 10만 유로. 유기농으로 재배된 채소와 꽃, 허브 판매도 4만 유로로 한 몫을 한다. 나머지 부족분은 농장의 취지에 공감하는 지역주민과 기부자가 참가하는 자선행사와 파티를 통해 6만 유로(약 7800만원)의 기금을 모은다. 우리처럼 기업의 기부가 없는 대신 시민들의 자발적인 기부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최근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케어팜의 질적인 관리를 위해 와게닝겐대 등 3개 농업대학에 농업과 치유를 접목한 학위과정을 개설하고 지역을 특성화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네덜란드 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케어팜은 새로운 트렌드이다. 2013년을 기준으로 노르웨이 1100개, 이탈리아 700개, 벨기에 660개, 오스트리아, 250개, 독일 160개, 아일랜드 130개 의 케어팜이 운영되고 있다. 유럽에서 케어팜은 폭발적인 증가세다.
최근 들어서는 네덜란드 케어팜을 배우려는 우리나라의 각 지자체와 농민단체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네덜란드 모델은 농가 지원에 무게를 두면서 사회적 약자의 복지를 결합한 역사적인 배경을 안고 있다. 네덜란드의 치료와 교육, 체험을 어떻게 우리 현실에 맞게 적용할 것인가? 어떻게 서비스 질을 지속적으로 담보할 것인가? 어떻게 재원을 마련할 것인가? 농촌 뿐 아니라 어촌과 산촌도 있고 의료계도 반대할 텐데 관련 부처가 풀어야할 숙제이다. 네덜란드 케어팜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하루빨리 적합한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해졌다.
*글=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사진= 푸르메재단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