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들의 기부로 세워진 병원
[미국 장애인 작업장 견학] 4편 밸리 어린이 병원 (Valley Children’s Healthcare)
“오늘의 병원을 만든 사람은 5명의 여성입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의 충격과 가난 속에 있던 어린이들에게 어머니가 되어줬습니다.” 기부자들의 이름이 유리에 빼곡히 새겨진 기부벽을 지나 유럽의 대성당에서 볼 수 있는 반구형 천장과 대형 세계지도가 그려진 로비에 들어서자 벽면에 걸린 여성들의 초상화가 나타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 프레즈노(Fresno) 북부에 있는 밸리 어린이병원(Valley Children’s Healthcare)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5명의 어머니들이다. 아그네스 크로켓(Agnes Crocket) 여사가 라나다 길드(Llanada Guild) 조합을 결성해 1949년에 기부한 5,477달러가 병원 건립의 마중물이 되었고, 다른 4명의 여성과 이에 호응한 수많은 시민들이 동참하면서 당시로는 거액인 32만 5,000달러가 모금됐다.
70년이 지난 현재의 병원은 소아과와 어린이재활의학과, 신생아집중치료 분야로 나눠 358개 병상, 550명의 의사가 근무하는 캘리포니아 최고의 어린이병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럼 병원이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한 아버지는 없을까? 안내를 맡은 사회복지사 콜린 앨드릭(Colleen Aldrich) 씨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친다. 언덕 위에 위치한 7만 평의 광대한 병원 부지를 기부해준 사람이 바로 농부라는 것이다.
한 아이가 잘 자라 건강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 가족과 친척, 그리고 이웃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비영리재단이 운영하는 밸리 어린이병원도 그 씨앗이 땅에 뿌려져 오늘이 있기까지 가장 먼저 병원 부지를 기부해주고, 그 땅 위에 병원을 세워 빈틈없이 운영하며 설립목적에 맞게 어린이를 최선을 다해 치료하기까지 기부와 봉사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헌신이 필요한지 절감하게 된다.
푸르메재단이 2016년 4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개원한 어린이재활병원도 2007년부터 9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시민들과 500개의 기업 및 단체가 뜻을 모아 440억 원이 넘는 기금을 모금해 건립됐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현재 매일 500명, 연간 15만 명이 넘는 장애어린이들이 치료받고 있다.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되돌아보면 이런 기적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기부자와 함께 우리 사회의 성숙한 기부문화가 아닐까 한다.
뾰족 지붕으로 이뤄진 밸리 어린이병원은 외형부터 디즈니랜드나 에버랜드를 닮았다. 병원 진입로에는 코끼리와 말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 모습을 살아있는 나무로 조각해 놓았다. 병원 현관에 조지(George)라는 이름을 가진 기린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다. 병원의 마스코트다. “왜 기린이 마스코트가 됐느냐?”는 질문에 콜린 씨는 “기린은 지구상에서 새끼를 낳는 포유류 중 가장 큰 심장을 가지고 있고, 큰 심장은 어머니의 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병원은 크게 외래재활센터와 입원병실, 응급실, 신생아집중치료실, 영상의학실, 환자가족이 머물 수 있는 가족호텔 ‘로날드 맥도널드 하우스(Ronald McDonald house)’로 나눠져 있다. 병원 안내를 위해 물리치료사인 캐롤 쿠루시마(Carol Kurushima) 씨가 나왔다. 그를 따라 물리치료실과 수유실(feeding Room), 자폐진단센터, 척수장애 및 뇌질환 중증장애 어린이를 위한 특수치료실 등을 차례로 둘러봤다. 모든 공간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고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었다.
메인 로비와 치료실, 입원실, 복도, 계단 등 병원 내 모든 공간을 하늘색, 연두색, 주황색, 초록색 등 밝고 따뜻한 질감의 색으로 칠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온 것처럼 경쾌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런 특징 때문에 치료를 받는 어린이는 물론 환자 가족과 방문객조차 병원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작업치료실이 비어있기에 “오늘 치료가 없느냐?”고 물었더니 캐롤 씨는 정색하며 “잠깐 쉬는 시간”이라고 대답한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행되며 치료사들은 세션이 1시간인 경우 7명을 치료해야 하고, 30분 세션의 경우에는 14명의 치료를 채워야 한다”고 설명한다. 한국 병원과 비교해 미국 병원의 치료사들은 여유 있게 일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7시간 치료를 해야 한다니 노동 강도 면에서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작업치료실에 톱과 망치와 드릴로 된 플라스틱 공구세트가 인상적이다. 손 기능을 돕기 위한 치료도구로 톱과 드릴이 사용된다니 낯설다. 하지만 못을 박고 나무를 자를 때처럼 생활에 필요한 활동을 작업치료에 응용한다는 발상이 재미있다.
20년 전 독일에 살 때 딸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의 학예발표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꼬마들의 율동과 합창 같은 장기자랑을 기대했는데 웬걸 남자아이는 물론 여자아이들도 나서 송판에 못을 구부리지 않고 얼마나 빨리 박을 수 있는지, 각목을 누가 빨리 자르는지 시합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서양 사람들의 실용적인 생활철학이 어린이재활치료에도 적용되는 것이 낯설고도 현실적이었다.
지하 1층에는 부모들을 위한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아이가 어떤 증상을 가졌고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보호자들이 학습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부모들이 포털사이트를 검색하고 다른 부모의 정보에 의존해 의학지식을 얻는데 반해 이곳은 부모들이 직접 병원 도서관을 찾아 의학서를 뒤지고 관련 논문을 검색한다니 문화적인 차이가 실감난다.
1층 복도를 지나다 평범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이 놀랍게도 수치료실이었다. 한국에서는 수조 때문에 보통 건물 지하나 병동의 외진 곳에 설치된 수치료실이 1층 한복판 엘리베이터 옆에 존재한다니 신기하다. 우리 같으면 수치료실 옆에 칸막이 탈의실과 샤워실, 치료 도구창고 등 많은 부속시설이 필요할 텐데 이곳은 10평 규모의 욕조와 체중이 무거운 사람을 옮길 수 있는 작은 기중기만 달랑 놓여 있다.
뇌신경 계통의 바이러스 감염과 척수장애가 있는 중증어린이들이 입원한 병동 입구에서 자원 봉사를 하시는 할머니가 큰 개를 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린이병원에서 웬 개?’하고 의아했는데 아이들을 위한 자원봉사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14년차 간호사인 자크 데이비슨(Jacque Davidson) 씨에 따르면 “입원 생활에 지친 어린이들을 위해 할머니 봉사자가 개를 데리고 입원 병실을 돌면 아이들이 제일 반긴다”고 설명한다. 개와 고양이를 쓰다듬고 말을 타는 동물매개치료가 장애로 굳어진 어린이의 몸과 마음을 푸는데 가장 좋은 치료라는 것이다. 어린이를 찾아가는 동물서비스가 한국 병원에도 도입되면 좋을 것 같다.
유치원 놀이방처럼 알록달록한 병실에 밤이 오고 천장에서 은하수별이 반짝인다면 아이들은 분명 탄성을 지를 것이다. 하지만 매일 반짝이는 은하수별에 싫증을 느낄 무렵, 또래의 친구들이 찾아온다면 갑갑하고 재미없는 병원생활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을 것 같다.
이 병원에서 특화된 것 중 하나가 친구 자원봉사 프로그램. 보이스카웃 청소년들이 휠체어를 타는 입원 어린이들과 농구와 배구, 암벽 등반을 함께 할 뿐 아니라 또래의 고민을 들어주는 ‘친구 되어주기’ 봉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퇴원한 청소년 네 사람이 어린이들을 위한 자원 봉사를 하고 있단다. 이중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휠체어를 타는 16살 소년이 정기적으로 입원한 어린이들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다는 말에 적지 않은 감동이 밀려온다. 나와 같은 고통을 가진 형과 오빠가 나를 찾아와 준다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어린이병원에 없는 특별한 것이 이곳에 하나 있다. 집이 멀거나 가난한 가족을 위한 무료가족호텔인 ‘로날드 맥도날드 하우스(Ronald McDonald House)’를 운영하는 것. 로날드 맥도날드 하우스는 맥도날드재단을 중심으로 많은 기업이 기부에 동참하면서 미국 사회공헌사업의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건물 입구에는 ‘마음 영웅들(Heroes of The Heart)’라고 명명된 기부벽이 자리 잡고 있다. 맥도날드사를 비롯해 미국 최대 통신사인 AT&T, 매시백화점, 대형 농장, 건설회사 등 200여 개 회사와 단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날개처럼 펼쳐진 두 개의 건물에는 4성 호텔급 객실 18개가 자리 잡고 있고 건물 중심에는 밥을 해먹을 수 있는 공동주방과 세탁실, 거실이 갖춰져 있다. 방 입구마다 매시백화점과 병원직원협회 등 객실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기업과 사람들을 기리는 안내판이 붙어있고 방으로 들어가자 침대와 TV, 냉장고에도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이 붙어있다.
로날드 맥도날드 하우스 전체가 기부 박물관이다. 식사를 제때 챙기기 어려운 환자 가족을 위해 다른 자원봉사자들이 식단을 짜고 날을 정해 온가족이 함께 식사를 마련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아마 이런 모습이 수많은 문제점과 사회적인 혼란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고 있는 저력이 아닐까 한다. 시민 기부로 건립되고 기부로 운영되고 있는 프레즈노의 밸리 어린이병원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글=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재단)
*사진= 최한성 (과천시장애인복지관 직업재활사)
주 소 : 9300 Valley Children's Place Madera, CA 93636-8762
전 화 : (559) 353-3000
홈페이지 : www.valleychildren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