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평생일자리를 위하여
[미국 장애인 작업장을 가다] 1편 에이블 인더스트리스(Able Industries)
“2019년 3월부터 미국 전역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동일하게 최저임금제가 시행됩니다. 상대적으로 일 잘하는 장애인들은 근로환경이 좋은 일반기업으로 떠날 텐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 비살리아(Visalia)의 장애인 작업장 <에이블 인더스트리스(Able Industries)>에서 만난 웬디 라이 에이어스(Wende Leigh Ayers) 원장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녀는 “우리 작업장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일거리를 확보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말했다.
에이블 인더스트리스는 1962년 비살리아 옆 지역인 툴레어(Tulare)의 지적장애인부모회가 주도한 장애인 교육센터로 출발했다. 그 후 비살리아와 디누버(Dinuba), 툴레어 등 인근 세 지역에 각기 다른 작업장을 만들었지만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따라 비살리아로 통합됐다. 현재는 개인용품과 식료품 포장, 생활용품 조립, 보안문서 파쇄 및 스캐닝, 청소, 세탁, 창고보관 등의 서비스를 하고 있다.
에이어스 원장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비행기 격납고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대형 작업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실내 작업장 규모는 2500평. 이전에는 세 배 규모였는데 통합해 줄인 것이 이 정도란다. 감탄이 절로 났다. 자기 건물이냐고 물었더니 빌린 것이란다. 월임대료는 매월 2400달러(약 270만 원)에서 절반인 1200달러(약 135만 원)로 줄어들었다.
처음에 방문한 곳은 물품창고. 창고형 매장인 코스트코와 이케아처럼 높이 10미터가 넘는 거대한 선반 위에 물건이 빽빽이 쌓여있다. 에이블 인터스트리스가 생산한 물품뿐 아니라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한 제품들을 보관해 주면서 이것들을 포장해 운송하는 일까지도 맡고 있다고 한다.
한쪽을 막아 만든 작업실에서는 비닐 캡을 쓴 장애인 세 사람이 작은 비닐봉지 안에 흰 가루를 열심히 담고 있다. 치약가루라고 한다. 보통 치약하면 비닐튜브 안에 젤과 같은 형태의 치약만으로 알고 있었는데 치약가루는 처음 본다.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들을 위한 것이란다. 보통 치약을 공급할 경우, 뚜껑이나 비닐 튜브가 자해나 다른 범죄 수단으로 이용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재소자들에게는 치약가루를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이어 방문한 곳은 종이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곳. 탱크처럼 생긴 두 대의 기계에서 하얀 분말이 쏟아져 나온다.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잘게 썬 종이 조각들이다.
기업과 은행에서 맡긴 문서를 파쇄하는 곳이다. 이 파트에서는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오후 4시 30분부터 밤 12시까지 2교대로 문서를 파쇄한다. 소음분진과 씨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 파트에서 일하는 장애인의 임금이 높다.
에이어스 원장의 설명을 듣다보니 재미있는 점이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을 ‘우리 직원’이나 ‘우리 장애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꼭 ‘고객(Client)’이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이유를 묻자 자신들의 프로그램에 참가한 소비자로 존중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종이에 그려진 그림대로 스프레이 꼭지를 조립하고 있는 한 여성장애인에게 일이 맞는 지 물어봤다. 미스티 켈렉스(53살, Misty Kelex)는 “18살부터 35년간 작업장에서 일해 오면서 매우 만족하고 있지만 외부에서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다 한 달 전부터 실내에서 일하다 보니 다소 답답하다”고 대답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작은 박스 안에 비닐장갑과 비닐 옷, 마스크, 청결제 등을 봉지에 담는 작업이 한창이다. 인근 교도소에 납품할 것으로 재소자들이 청소를 하는데 사용된다고 한다. 가격은 40~50달러 선. 그때그때 주문에 따라 품목을 바꾼다니 이 작업장의 가장 큰 고객은 교도소인 것 같다.
왜 이렇게 교도소 용품이 많으냐고 물었다. 일반고용이 어려운 시각장애인들에게 고용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1938년 제정된 「와그너 오데이」(Wagner O'Day)법이 다른 중증장애인에게 확대돼 작업장 생산품을 우선 구매하도록 규정한 「자비츠 와그너 오데이」법으로 1971년 개정됐다. 이로 인해 정부와 학교, 교도소 등에서는 필요한 물품의 10~15%까지 장애인 작업장에서 구매하면서 그 혜택을 에이블 인더스트리스에서 보고 있다. 에이블 인더스트리스는 매달 입찰에 참여하고 있지만 특별한 경우가 없는 한 낙찰 받고 있어서 안정적인 일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2016년 에이블 인더스리트스의 연간 예산은 6백 45만 달러(약 72억 2000만 원). 265명의 장애인과 75명의 직원이 단순 포장 등 임가공업에 종사하고 있다. 장애인 작업장 규모로는 중간 정도이다.
예산의 45%는 캘리포니아 주정부가 장애인 시설의 운영과 관리를 맡기고 있는 비영리기관(NGO)인 CVRC(Central Valley Regional Center)를 통해 지원하고 있다. 나머지 55%는 에이블 인더스트리스가 물건을 납품하거나 용역을 해주고 받은 수익금, 회사에 프로그램을 제안해 받은 사업비, 지역사회로부터 받은 기부금 등으로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비영리기관인 CVRC가 주정부를 대신해 장애인의 의료와 일자리를 지원하는 정부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우리 같으면 정부와 기업이라는 두 축이 사회 전반을 주도하고 있는데 반해 미국은 정부와 기업 못지않게 NGO가 정부와 기업과 함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면서 정부와 기업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것이 이채롭다.
이번 미국 장애인시설을 방문하는데 동행해준 로버트 밥 핸드(67살, Robert Bob Hand)씨는 “캘리포니아 장애인들의 한 달 급여는 평균 800달러(약 90만 원)로 높지 않지만 이와는 별도로 장애인 수당과 생활비가 약 800~1000달러가 지원되고 있어 다른 주의 장애인과 비교하면 상황이 좋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밥 씨는 42년 동안 캔사스와 아이오와, 뉴멕시코, 캘리포니아에서 장애인 작업장과 그룹홈을 만들어 관리해왔기 때문인지 미국의 장애인 지원제도에 대해 에이어스 원장보다 훨씬 더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대답을 해줬다.
일하고 급여 받는 단순한 생활에서 벗어나 장애인들이 주체적으로 삶을 결정하는 것들도 캘리포니아에서는 실험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그중 좋은 예가 장애인 봉사제도. 지역사회의 도움 없이 장애인 작업장도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일정시간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제도를 도입했다고 한다. 장애인들이 직접 도심 공원과 화장실 등을 다니며 청소하고 지역사회에 필요한 일을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에이블 인더스트리스에서는 6개월 임기의 반장 선거와 매달 설문조사를 실시해 장애인들이 느끼는 문제점을 조사하고 있다.
거대한 작업장 한쪽은 통제구역이었다. 에이어스 원장을 따라 보안이 철저한 두개의 문을 따고 들어가니 4명의 장애인이 서류 속에 파묻혀 일하고 있다. 기업의 2005년 수입내역과 교회의 2009년 기부자 명단이 눈에 띈다. 서류들을 점점 더 보관하기 어려운 만큼 작업장에서는 서류들을 모두 스캔해 작업을 의뢰한 고객들에게 보낸다고 한다. 극비서류인 만큼 비밀이 외부로 새어나갈 염려가 없는 지적장애인들이 이 업무를 수행하는데 적격이라고 설명한다. 이 공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파쇄기와 대형스캐너 등 값비싼 기계는 모두 기업으로부터 기부 받은 것이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상대적으로 고임금인 문서스캔이나 파쇄 업무도 있지만 대부분은 플라스틱 치실이 그려진 종이판 위에 치실을 올려놓은 뒤 개수대로 포장을 하는 단순노동에 집중되어 있다.
밥 씨는 “2019년 최저임금제가 시행되면 멀리 떨어진 곳이나 환경이 열악한 작업장은 외면 받을 수 있고 이로 인해 영세 작업장은 점점 더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에 남은 기간 동안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남은 2년 동안 작업장이 스스로 대안을 마련하거나 갑자기 생산성이 높아질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결국 문을 닫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밥 씨는 “지금까지 미국사회가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견뎌왔듯 각 주정부와 책임을 맡고 있는 CVRC에서 장애인과 작업장이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대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 장밋빛 기대가 아니냐”는 이어진 질문에 “그게 미국의 힘”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내게는 과연 가능할까 걱정으로 보이지만 그는 42년 동안 미국 비영리분야에서 일한 경험에 근거해 미국 정부를 굳건하게 믿고 있다는 게 부러웠다.
인터뷰를 마치고 에이블 인더스트리스의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We are fundraising with see’s candies’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와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다. 마을 마라톤과 바자회 같은 행사에 시민들이 참여해 캔디를 사면서 기부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NGO를 믿고 장애인 관련 정책과 예산을 맡기는 미국 정부, 변화하는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장애인 작업장, 장애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NGO, 장애인들에게 도움의 손을 내미는 지역사회, 도움을 주는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려는 장애인들. 이런 노력들이 어우러져 미국 장애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
*글=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재단)
*사진= 최한성 사회복지사 (과천시장애인복지관)
주소 : 8929 W Goshen Ave. Visalia, Ca 93291
전화 : 1-559-651-8150
홈페이지 : www.ableindustrie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