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서 나의 진짜 인생을 외치다
[일본 나고야·다카야마 장애인 천국을 가다] 4편 AJU 자립의 집
“복지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복지를 만듭니다.”
동네에서 친구를 사귀며 거리를 활보하고 일상을 보내는 자유. 쉽고 당연한 일이 장애인에게는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어렵고 간절한 일이다. 집이나 거주시설에서 나온 장애인들이 “마을에서 같이 살아보자”며 삶을 꾸려가는 곳, 장애인이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진정한 복지라고 말하는 곳이 있다.
▲ AJU 자립의 집에서 운영하는 와다치 컴퓨터 하우스에서 장애인 직원들이 컴퓨터 업무를 하고 있다.
나고야시 쇼와구에 위치한 AJU 자립의 집(AJU自立の家)은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자립생활센터이다.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복지마을을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1973년 설립 이후 장애인 일터 ‘와다치 컴퓨터 하우스’, 자립홈 ‘사마리아 하우스’, 와인제조업체 ‘피어 나고야’, 정신장애인 그룹홈 ‘나고야 멕‧피트 하우스’ 등을 운영하며 장애인 자립의 역사를 일궈왔다.
컴퓨터 전문가로 거듭나는 곳
와다치 컴퓨터 하우스는 중도장애인이 컴퓨터를 사용해 일하는 일터로 조용한 주택가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노동을 통해 자립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진 장애인들이 1984년 세운 중견 컴퓨터 회사이다. 사업 기획과 업무 진행뿐만 아니라 예산 작성, 급여 배분 등의 세부적인 역할도 장애인이 주도해서 이뤄지고 있었다. 지체, 시·청각, 발달장애, 정신장애인 직원 42명과 비장애인 직원 13명이 함께 일한다.
장애인 직원들은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입력을 하는 등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이제껏 장애인 일자리라고 하면 제품을 생산하는 모습에 익숙해서인지 보이는 광경이 다소 낯설었다. 마코토 미즈타니(水谷 真) 소장은 “데이터 입력, 시스템 개발, 조사기획, DM발송 및 인쇄제작 업무를 4개의 작업실에서 담당하고 있다.”며 먼저 시스템 개발실로 안내했다.
와다치 컴퓨터 하우스는 주로 정부나 지자체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장애인의 관점을 살린 컨설팅이 강점이다. 나고야 중부국제공항을 누구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유니버설 디자인을 반영한 설계 기획, 지리정보시스템(GIS)를 통해 재난 피난 지원 시스템 기획과 피난 지도 제작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피난 지도는 주민 워크숍에서 자주 사용될 정도로 활용도가 좋다고 한다. 장애인 택시 예약 시스템도 자랑할 만한 사업으로 꼽힌다. 휠체어 승하차 택시를 이용하고 싶은 장애인들이 예약을 하면 담당 직원이 접수해서 사용가능한 택시를 연결해준다. 나고야시에서 장애인 택시 5대를 지원하고 있어 중계소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 장애인 택시 예약관리를 담당하는 지체장애인 직원이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장애인이 일하는 회사라서 일을 따내는 것이 유리하리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비장애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영업을 뛰고 계약을 따낸다. 상대방이 ‘오케이’ 할 때까지 문을 두드린다. 물론 초기에는 장애인의 업무 능력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영업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차별 아닌 경쟁”이라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통했던 걸까. 지금은 비장애인과 대등한 입장에서 발언권을 갖고 설계 기획에 참여하는 일이 늘었다.
데이터 입력실이 유독 바빠 보였다. 입력을 마치면 조사기획 업무 담당자들이 데이터를 분석해 자료집을 제작할 수 있도록 시간 내에 자료를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업무량이 부쩍 많아져 아르바이트를 채용할 정도라고 한다.
원하는 일을 한다, 고로 존재한다
직원들은 장애 정도에 따라 작업환경을 바꿔 편안하게 일한다. 나고야시 골프장의 새 시스템을 관리하는 한 중증장애인은 바닥에 담요를 펴고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몸은 불편해도 전문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베테랑이라고 한다. 장애를 환경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장애에 맞추라는 구호가 가슴에 절절히 와닿는 순간이었다.
컴퓨터 관련 직종이 부가가치가 높은 특성상 급여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신입직원이 20만 엔(약 200만 원)을 받는데 비장애인 직원보다 많이 받을 때도 있다고 귀뜸했다. 요즘은 외부 업체와의 경쟁이 심화돼서 영업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정부의 보조금으로 인건비와 운영비를 충당할 수 있다고 한다. 장애인 직원들 대부분 부모로부터 독립해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다. 집도 직장 근처에 얻어 출퇴근도 수월하다. 각자에게 주어진 업무를 책임지고 해나가는 직원들에게서 ‘전문가’의 모습을 본다.
내일을 꿈꾸며 하숙하는 사람들
▲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돕는 사마리아 하우스는 체험홈, 자립홈, 주간보호센터로 구성되어 있다.
와다치 컴퓨터 하우스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장애인이 생활하는 사마리아 하우스와 만날 수 있다. 주택과 작은 상점들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성당 옆 탁 트인 곳에 자리한 화사한 2층 건물. 외관은 전망 좋은 펜션처럼 느껴졌고 안으로 들어서니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휠체어를 탄 채 마중 나온 사마리아 하우스의 오사무 이사다(石田 長武) 소장은 “장애인의 하숙집에 오신 걸 환영한다.”라고 반겼다.
사마리아 하우스는 장애인이 자립생활을 준비하기 위해 주거할 수 있는 체험홈과 자립홈, 지역주민과 관계 맺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주간보호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자립홈 입주자는 15명, 주간보호센터 이용자는 10명, 운영 지원을 담당하는 직원 10명이 함께한다.
주거 공간만 제공하고 시간은 온전히 장애인의 선택으로 채워진다. “이용자의 의사 존중한다는 원칙으로 정해진 일과가 없고 입주자가 주도적으로 만들어가야한다. 단순히 거주할 곳이 필요한 장애인은 우리의 이념과 맞지 않다.”라고 오사무 이사다 소장이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주로 가족과 시설의 보호에서 벗어나 주도적인 삶을 살아가길 원하는 장애인들이 일정 비용을 내고 입주하고 있다. 취업 여부에 따라 5,500엔~20,000엔(약 55,000원~200,000원)을 지불한다.
체험홈은 3일~2주일 정도 자기 생활을 경험해보는 임시 주거 공간이다. 자립홈은 지역사회 안에서 생활하며 사회 경험을 쌓으며 자립 능력을 갖출 때까지 최대 4년 동안 거주할 수 있다. 두 방의 구성이 확연히 달랐다. 체험홈에는 TV, 침대, 책상, 조리기구 등 생활에 필요한 기본 물품이 갖춰져 있지만, 자립홈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얀색 빈 방이 전부다. 막상 입주하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것 같다.
▲ 장애인이 가족이나 시설로부터 독립해 자기 생활을 체험해볼 수 있도록 꾸며진 체험홈.
▲ 자립홈 입주자의 개성이 느껴지는 문패가 눈길을 끈다.
오사무 이사다 소장은 “필요한 물품은 스스로 고르고 구입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문 앞에 개성이 담긴 명패를 붙이고 텅 빈 방에 자기가 필요한 물건을 채워넣는 과정을 통해 어디에도 없는 ‘자기만의 방’이 탄생하는 것이다. 하얀 도화지를 자기만의 색깔로 물들이는 기쁨을 상상해본다.
자립의 ‘성공’과 ‘실패’를 말하기 전에
아무리 자유로운 공간이 있어도 중증장애를 가졌다면 생활이 어렵지는 않을까? 일본에는 활동보조제도와 비슷한 홈헬퍼 제도가 정착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혼자서 생활이 어려운 중증장애인에게 가사 및 이동 지원, 방문목욕, 방문간호 등으로 서비스가 한정되어 있고 이용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일본에서는 일상 지원뿐만 아니라 자립 훈련, 의료 지원 등 서비스 범위가 폭넓고 이용 시간도 길다. 헬퍼가 필요한 입주자는 본인이 직접 신청해 이용하고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면 홍보 전단지를 돌려 모집하기도 한다. 직원들은 단순히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장애인이 선택한 방향대로 나아가도록 최소한으로 개입하고 있었다.
▲목욕탕 예약 게시판. 장애 정도에 따라 목욕 시간이 다를 수 있는 점을 고려해
원하는 시간에 명찰(1개당 30분)을 걸어놓고 사용한다.
25년 동안 사마리아 하우스를 거쳐간 장애인은 100여 명. 대부분 지역사회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자립홈의 경험을 살려 헬퍼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며, 후배 입주자를 위해 자원봉사를 오기도 한다.
다시 한국의 현실로 눈을 돌려본다. 장애인 거주시설에 맡겨져 15년 간 살다가 ‘탈출’을 감행한 장애인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막상 나오더라도 활동보조제도를 비롯해 자립을 돕는 사회복지 서비스들이 받쳐주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요받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AJU 자립의 집처럼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의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낀다. 종로구에 위치한 푸르메재단과 마포구에 들어설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지역에서 더 많은 장애인들을 만나고 싶다.
*글, 사진= 정담빈 간사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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