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에 보드라운 숨결을 불어넣는 사람
[열정무대] 장미정 작가
복슬복슬한 모양의 캐릭터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보드라운 털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 생생합니다. 그림은 그리는 사람을 닮는다고 했던가요? 캐릭터를 탄생시킨 주인과 빼닮았습니다. 예민하고 날카로워진 감정을 녹여 부드럽고 편안하게 해줍니다. 캐릭터의 이름은 ‘보’라고 합니다.
나만의 그림을 하겠다는 결심… 캐릭터의 탄생
캐릭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인 장미정 작가가 캐릭터 ‘보’의 주인입니다. 지체장애로 휠체어를 타지만 시종일관 표정이 밝습니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언니 동생 할 만큼 친해졌습니다.
캐릭터 일러스트라는 분야에 뛰어든 지는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전까지 무관한 일을 해온 것은 아닙니다. 애니메이션 하청업체에서 작품 컷을 검수하는 작업 경력만 8년입니다. “작업자가 다리 한 쪽을 빼먹고 안 그려서 직접 붙여야 했던 적도 있어요.” 페인팅 된 컷들이 연결되도록 맞춰서 색깔을 보고 빠진 부분이 있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일을 했습니다. 국내 애니메이션의 하청 제작을 도맡을 정도로 큰 회사였으나 중국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고민하다가 ‘내 그림을 그리자’는 결심에 닿았습니다. 블로그를 열어 습작 그림을 올렸습니다. 원하는 형태로 그림을 만들어보고 이름을 붙여보길 수차례. 미술, 일러스트, 카툰 등 다양한 매체를 접하며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싹텄고 조금씩 꽃을 피우게 되었습니다.
아트상품 도전하니 자신감은 덤으로
올 봄에 캐릭터 인형을 제작하기 위해 지원하는 곳을 알아보던 중, 장애인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단체인 상록수에서 아트상품을 개발할 아티스트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고 곧장 찾아갔습니다. 장미정 작가를 포함해 장애인 아티스트들은 현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아트상품은 다들 처음이었습니다. 장미정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동료 아티스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합니다.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모르겠다던 한 참가자는 그리고 싶은 그림이 분명해졌다며 고마워했습니다. 지난 10월 아트상품전시회 ‘알록달록’이 열렸습니다. 장미정 작가는 캐릭터 ‘보’를 활용한 스티커와 박스테이프를 선보였습니다.
“저보다 몸이 불편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 더 강렬한 장애인 아티스트들과 함께 준비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다양한 캐릭터 일러스트를 아트상품으로 전시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고 그 이상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어요.”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 툴로 작업해오던 장미정 작가는 아트상품 전시회에 참여하면서 아날로그 느낌의 손그림 작업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손작업은 그래픽 툴보다 어렵고 힘들지만 원하는 대로 표현할 수 있어요.”라며 손그림의 매력에 푹 빠진 듯 당분간은 손으로 그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A4 크기는 하루가 걸리고 이보다 큰 규격에 작업하면 10일 정도 걸리는 편입니다. 캐릭터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살리기 위해 그래픽과 손그림을 적절히 섞어 작업할 것입니다.
지금 느낌 그대로를 표현하다
장미정 작가의 블로그에 접속하면 그간 구축해 온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매번 색다른 느낌의 캐릭터가 반겨주고 방문자들은 답글로 화답합니다. 자신은 몰랐던 작품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블로그를 통해 소통하며 다음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자주 업데이트를 하지 못하는데도 ‘얼굴 모르는 팬’들이 여전히 쪽지로 응원을 해줍니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굳이 자신의 장애를 밝힐 필요도 없어 작품 자체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장미정 작가의 좌우명은 ‘기본을 지키며 그림에 사치를 부리지 말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 그대로 표현하자는 순수함이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영양분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장미정 작가에게 영감의 원천은 어릴 적 읽은 책. 19살 때까지 집에만 틀어박혀 고전소설부터 에세이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을 섭렵했습니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웃다보니 자신감도 저절로 생겨났다고요. 재미있게 보낸 시간이 삶의 밑바탕이 되어 캐릭터의 형태로 하나둘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직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 많잖아요. 50세까지 딱 10년만 더해보자. 그런 다음에 그때 또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즐기면서 해요.”라며 웃습니다. 장미정 작가의 얼굴에서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흘러넘칩니다.
지금까지의 작품들 모두가 소중해서 어느 하나 빼놓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뽀글뽀글한 빨강머리가 특징인 ‘보’ 시리즈는 10가지 이야기로 만날 수 있습니다. 보의 친구인 토끼는 지혜롭고 현명하게 행동하며 늘 보의 옆에 있어주는 반면 돼지는 투덜대고 꾀를 부리며 혼자 있길 좋아하는 캐릭터입니다.
‘소통하는 아트샵’을 꿈꾸는 사람
무슨 일을 하든 마냥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찾아나서는 성격이라는 장미정 작가. 혼자서 준비하는 과정은 힘들지만 작품을 위해서라면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어디든 찾아갑니다. 인터넷 카페에 작품을 알리고 아트상품 전시판매 공간에 입점하겠다는 목표도 수없이 발품을 팔며 세운 것입니다. 단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작업상 자주 들러야 하는 인쇄소에 장애인은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것.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장애인 편의가 잘 갖춰진 문턱 없는 인쇄소가 있다면 알려달라고 요청합니다.
2015년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우선 그림 그리는 작업에 집중할 거예요. 그림이 쌓이면 전시회를 열고 아트상품을 제작해 판매하려고 합니다. 단편 애니메이션에도 도전하고 싶고 자선바자회에 참여해 저의 캐릭터 상품을 의미 있는 일에 쓰고도 싶습니다.” 벌여놓은 일만 수두룩하다며 쑥스러워하면서도 계획한 일들을 얘기하는 장미정 작가의 표정이 환해집니다. 꿈꾸는 사람의 얼굴을 보니 마음도 화사해집니다.
장미정 작가의 여러 가지 계획들을 종합하면 어떤 꿈이 만져질까요? “저의 그림과 아트상품으로 소통할 수 있는 아트샵을 만들고 싶어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재미있게 창작활동을 하며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으로요. 즐겁게 작업해서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며 살고 싶어요. 꿈은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만들어 나갈게요. 계속 지켜봐주실 거죠?” 꿈꾸는 사람의 숨결이 불어넣어진 캐릭터를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글, 사진= 정담빈 간사 (커뮤니케이션팀)
*작품 사진= 장미정 작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