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하여
생후 10개월, 의사의 오진으로 인한 의료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거친 끝에 나는 장애인이 되었다. 대신 몸 전체를 기준으로 하여 왼쪽 부분이 모두 마비가 되어 왼쪽 입꼬리도, 왼 팔도, 왼쪽 다리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가끔 신경이 자극되었는지 덜덜덜 하고 떨곤했다. 이처럼 처음에는 안면을 포함해 신체의 왼쪽 전부가 반신마비 되었었으나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응급수술을 거친 뒤에 하반신을 제외하고는 기능이 회복되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 천천히 목발을 짚고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나를 키웠었던 우리 엄마는 26살이었고 우리 아빠는 30살이었다. 당시 20대 부부였던 우리 부모님은 의료사고 후 수년간 대학병원과 싸웠고, 이 비극의 끝은 약 천여만 원의 보상을 받는 것으로 종결지어졌다. 하지만 천만 원은 턱없이 모자랐다. 살아남기 위하여 어린시절 거의 전부를 대학병원에 입원해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당시 척추가 83도 휘었던 측만증 수술을 앞두고 한 대학병원 어린이병동에 입원했었다. 어린이병동에 있을 당시, 내 옆 병상에는 또래의 친구가 누워있었다. 십수년 전 일이라 그 친구가 정확히 무슨 병을 앓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꽤 심각한 병이었다. 내가 입원해있을 2000년 초에는 만화책 ‘그리스로마신화’와 ‘가시고기’가 유행했었다. 서로 수술을 앞두고 마땅히 할 일이 없는 우리는 함께 만화책을 보거나, 투니버스를 보며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잠든 사이였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그 사이 죽었다고 엄마가 말씀해 주셨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친구의 병상을 정리하며 남겨진 가시고기와 그리스로마신화 만화책, 그리고 친구가 타고 다니던 휠체어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그 아주머니 또한 병원에서 만날 수 없었다. 아들이 떠난 자리를 정리할 때 홀로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도 어떻게 그의 죽음을 맞이했었는지 슬퍼했었는지 충격이 커서 그런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나는 그 후로 선물받은 그의 휠체어를 타고 지내다가 며칠 지나, 어느날 밤에 휠체어를 도둑맞았다. 휠체어가 사라져 아침에 깜짝 놀란 우리 엄마는 도난당한 휠체어를 찾아 서울대학병원뿐만 아니라 혜화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결국은 찾지 못했다. 휠체어를 잃어버리고 나니, 그 친구는 내 곁에서 아주 떠났다.
서울대학병원 어린이병동에서의 계속되는 입원은 너무도 힘들었다. 로비에 보이는 내 또래 아이들을 볼 때면 자꾸 슬프고 무서웠다. 귀가 조금 잘려 있거나, 눈이 시뻘겋게 충혈돼있거나, 머리에 붕대를 감은 친구들을 매일 마주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러한 병동의 분위기가 너무도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 무서웠다. 우리들은 대체 왜,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아파야만 하고 죽음과 사투해야만 하는가. 나는 매일 슬퍼했고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엄마도 병간호를 하는 내내 너무 힘들어하셨다. 돌이켜보면 나는 특별한 외상을 갖고 있지 않던, 그다지 아파보이지 않던, 마주하고 있어도 큰 슬픔을 갖지 않아도 됐기에 먼저 떠난 그 친구와 친해질 수 있었다. 비록 병의 증상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아팠었나 보다. 일찍 떠난걸 보니.
나는 친구가 떠난 그때부터 죽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초등학생의 어린나이일 때부터 죽기를 두려워 했다. 어쩌면 당장 몰라도 될 죽음을 너무 빨리 알게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매일 나를 시달리게 했고, 어렸던 나는 수술을 하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하기를 포기했다. 울며 불며 수술하지 않겠다며 집에 보내달라고 엄마에게 생떼를 부렸고, 수술을 하루 앞두고 퇴원하게 되었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나 13살이 되었다. 더 이상 수술을 미뤄서는 죽을 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경고를 받고서야 그 죽음이 두려워 다시 입원했다. 상계동의 한 대학병원이었다. 수술을 앞두고 수술실로 실려가는 도중에 나는 부모님 손을 꼭 부여잡고 “죽기 싫다.”며 엉엉 울었다. 그러다 언젠가 마취가 되었는지 깊은 잠에 들게 되었다. 그렇게 수술실로 들어갔다. 측만증으로 척추를 포함해 이미 휘어진 갈비뼈가 더는 폐부를 찌르지 않도록 갈비뼈를 다 도려내는 큰 수술이었다. 10시간이 넘는 대형 수술이였다. 죽기 싫다고 소리치는 자식을 억지로 수술실로 떠밀려보낸 부모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부모님은 10시간 넘게 수술실 앞에서 ‘아들이 살아 돌아와 달라’고 기도를 하셨다. 지금도 수술실 앞에서 기도하는 부모님 모습을 상상할 때면 눈물이 난다. 조금 더 의연하게 씩씩하게 수술실로 들어갈 걸. 왜 나는 죽음을 언급해가면서까지 부모님 마음을 더 힘들게 했을까.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 후 약 10년간 최근까지 죽음을 잊게 되었다. 그러던 지난 7월, 내가 타고 있던 차량이 폐차될 만큼의 큰 교통사고를 겪었을 때 딱 십 년 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찾아왔다. 입에서 피가 흘러 나오고, 응급차에 실려가는데 졸음이 왔다. 이렇게 잠 들었다 혹시라도 눈을 못 뜨면 어쩌지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발병할 수 있는 무자비한 후유증들과 그 구체적인 병명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살껍질이 벗겨진 어깨는 손가락 마디 끝을 간신히 조종했다. 급히 응급실로 달려온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퉁퉁 부어버린 입술은 침을 머금지 못해 숨겨두었던 나의 두려움들을 뱉어내게 만들었다. ‘엄마… 미안해. 오늘 집에 일찍 지하철 타고 들어갈 걸.’
따끔거리는 찰과상 부위들은 내가 얼마나 부모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알도록 채찍질했다. 다행히 나는 다시 살아남았다. 호전되는 과정에서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동시에 이렇게 부모님을 속 썩이면서까지 연명하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너무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렇게 죽음에의 공포는 항상 무거운 죄책감으로 결론이 나곤 했다. 예전부터 어느날 문득 부모님보다 먼저 떠난다는 상상을 할 때면, 죽기 전에 진심을 다해 부모님께 사랑을 표현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그 꼴이 되어서도 응급실에 쫓아온 엄마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도 졸렬했다. 살아남기 위해 한순간 부숴져버린 자동차에서 안경도 목발도 휴대폰도 던져버린 채 살겠다며 팔 다리로 엉금 기어나와서는 고개를 땅에 조아리고 고통을 머금을 만큼 급박했음에도 말이다. 응급실에 누워있는 내내 내 발 밑에 웅크려 쪽잠을 자고 있는 어머니의 오므린 발가락에 미안해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이처럼 나는 장애를 시작으로, 또 몇 가지 의도치 않은 사고 때문에 죽음에 대하여 늘 의식해왔다. 죽음은 굉장히 막연하고 모호한 것 같아도 항상 죽음의 위기가 다가오는 사연을 생각할때면 가장 현실적이고 무거운 문제로 다가오곤 했다. 지금도 종종 내가 몇 살까지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한다. 유독 잠들기 전에 그런 생각이 날 덮치곤 하는데 그럴 때면 한참 심장이 두근두근거리고 속이 매스꺼워진다.
혹시 지금 나의 장애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그 사실에 무기력해지고 싶지 않다. 수술실에 실려가기 전 “나 죽기 싫어.”라고 말했던 그 때처럼 더 삶을 갈구하고 싶다. 그동안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욱 오래 함께 하고 싶다.
사실 ‘언제 죽을지’ 그 시기에 대한 물음은 ‘몇 살부터 진짜 의젓한 어른인가’와 비슷한 모호한 물음이다. 몇 살부터 어른이라는 자격이나 정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는 확신이나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언젠가 다가올 그 죽음의 시간을 담담하게 인식하고 지금처럼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아직 22살인 내가 죽음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너무 시기상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장애를 갖고 살아온 20여 년간 병상에서 먼저 떠나보낸 내 친구들과, 죽음의 문턱을 몇 번 반복한 내게 있어 근본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은 내 장애에 대한 고민 이상으로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이다. 죽음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해 내린 잠정적 결론은 하나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살아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오늘 하루도 더욱 나를, 나의 가족을, 나의 친구들을 사랑할 것이다.
나는 지금 살아있다.
*글=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는 1993년 10월 30일생으로 생후 10개월에 불의의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하고 있으며, 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존레논과 아웅산 수지 여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