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기 화백을 찾아서 - 캔버스에 봄이 오는 소리
민정기 화백을 찾아서
캔버스에 봄이 오는 소리
봄은 겨울 가지에 매달린 꽃망울에서가 아니라
캔버스를 수놓는 화가의 손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하의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처럼
화가의 노고는 겨우내 쉴 틈이 없습니다.
하얀 캔버스를 대하는 눈빛이나 손놀림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 주말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서양화가 민정기 선생님의 작업실에 다녀왔습니다.
문간까지 마중 나오신 선생님의 머리에는 어느덧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습니다.
“날이 너무 좋지요. 이제 정말 봄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북두칠성을 그려 넣으신 도자기에 차를 따라 주시는 선생님의 얼굴에는 봄날 아지랑이 같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화가도 시인처럼 숨죽여 봄을 기다리나 봅니다.
민정기 화백님은 지난 30여년간 외롭게 작품활동을 해오셨던 양수리 서종면 언덕배기의 외진 작업실에서
지난해 경기도 장흥으로 무대를 옮기셨습니다.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냉난방에 신경 쓸 것도 없고 주위환경이 좋고
산책하거나 식사하기도 편해서 무엇보다 많은 시간 창작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작업실 한쪽에는 연두색이 가득 칠해진 캔버스가 벽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마치 화사한 봄날처럼 말입니다.
"미소는 미소를 부르고, 슬픔은 슬픔에 답한다."는 고대시인 호라티우스의 격언이 생각났습니다.
다른 벽면에는 두 개의 큰 그림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자연을 주로 그렸는데
요즘에는 자연과 어우러진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하시네요.
“지금 그리고 있는 두 작품은 경기도 <여주>와 <안산>을 표현한 것인데
유유히 흐르던 강물 주위에 아파트와 건물이 올라가고
이포보 같은 인공물이 생겨나 자연에 큰 변화를 주고 있지요.
안산만 하더라도 과거 언덕에 동헌(東軒)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지금은 고층건물이 세워지고 인근에 다리와 터널이 생기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고 새로운 안산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거지요.”
말씀을 듣고 보니 과거에 그림에는 산과 강, 나무, 꽃과 같은 소재였는데
어느 순간엔가 자연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삶과
사람들이 만든 건축물들이 캔버스에 담겨져 있습니다.
▲ <소나무>(왼쪽), <양수리>(오른쪽)
정치적 탄압과 경제발전이라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던 1980년대, 민정기 선생님은
민중미술운동을 주도하면서 <포옹>, <세수>, <이발소> 같은 민중의 삶을 표현한 그림을 주로 그렸습니다.
붓을 통해 정치적 억압을 고발하고 소비사회로의 진행을 비판했습니다.
그 후 30여 년 전 양수리로 거처를 옮긴 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이 땅을 지켜온
산과 강물, 나무의 풍경화에 천착했던 작가는 ‘머어언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이처럼’ 자연과 인간을 달관된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14세기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천재화가 조토 디 본도네에 대해
미술사가들이 '미술의 혀를 풀어주었다.'라고 평가하듯이
선생님의 화풍은 평면 예술에서 벗어나 마치 시인이 시를 낭송하듯
보는이의 눈과 마음 뿐 아니라 귀를 통해서도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 합니다.
아마 이런 연륜과 안목이 쌓여서 2006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예로운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하셨는지 모릅니다.
그에게 올해 계획을 물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생각하고 붓질하고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거지. 뭐 특별한 것이 있나요.”하고 웃었습니다.
그 모습이 10년은 더 젊어 보였습니다.
작업실 한복판에 있는 큰 유리병에는 선생님이 쓰시는 붓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색색가지 물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색의 연금술사인 선생님의 손길을 거쳐 물감들은 새로운 마술을 부리겠지요. 새롭게 탄생할 작품을 기대하면서
선생님과 푸르메재단의 인연을 생각해봤습니다.
2006년 9월. 민정기 선생님은 푸르메재단이 건립되고 첫 걸음을 뗄 무렵 <채송화>와 <연못>등
당신의 판화 40점을 앞으로 재활병원을 짓는 데 사용해 달라고 기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2년 7월 종로구 효자동에 있는 푸르메재활센터가 건립될 때 가로 3.3미터, 세로 2.5미터의 대작,
설악면에 봄이 오는 풍경을 그린 <묵안리의 봄>을 재활센터 1층 로비에 그려 주셨어요.
이곳을 찾는 많은 분들은 선생님의 대작이 1층 로비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에 놀라고,
다음에는 그 작품의 아름다움에 반한다고 합니다.
푸르메재단과 민정기 화백님의 아름다운 인연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기대합니다.
*글, 사진=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