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러브레터] 인생에 도통한 장애인 부부 이야기


 


 


인생에 도통한 장애인 부부 이야기


 


 


새해를 맞이한 지 벌써 보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연말연시의 들떴던 분위기도 이제는 많이 가라앉아 차분해졌습니다. 매년 이 때만 되면 제가 사는 골목길에서는 열 가구 정도 주민들이 모여 아침식사를 합니다. 각자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갖고 나와 골목길 사탕단풍나무 아래에 모인답니다.


 


보통은 새해를 맞아 덕담을 나누는 걸로 시작하는데 골목길에 사는 이웃 중에는 새로 이사 온 사람들도 있지만 줄리와 이안 부부처럼 오랫동안 여기 살다 다른 동네로 이사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침 이날 모임에서 이들 부부의 이야기 나와 생각난 김에 오후에는 새해인사를 겸해 찾아가 보았습니다.


 



▲ 다정히 포옹하고 있는 줄리(사진 오른쪽)와 이안 부부


 


장애인 사회복지협회에서 일하는 줄리는 태어날 때부터 골형성부전증으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늘 명랑하고 활발한 성격 때문인지 “어떤 것은 좋았고 또 어떤 것은 나빴어요(Something is good, Something is bad)”라고 인생에 도통한 사람들처럼 웃으며 쉽게 말합니다. 줄리는 같은 장애를 지니고 있는 장애인 인권변호사인 이안과 결혼해서 30년 가까이 살아왔습니다. 오랜 된 부부이지만 늘 신혼처럼 사이좋게 지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이따금 떠나는 여행은 늘 신혼여행이 됩니다.


 


“재작년에는 부모님 만나러 하와이에 갔었는데 이번에는 이안이 가까운 곳으로 가자해서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밀포드 사운드에 다녀왔어. 밀포드 사운드는 바다에서 내륙으로 15킬로 정도 들어가 있는 물길인데 우리는 크루즈를 탔지. 배 안에서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보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태초로 돌아간 것 같더군. 물안개 피어오르는 피요르드 해안을 따라 펼쳐지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로 배가 지나갈 때는 자연이 주는 웅장함과 장엄미가 우리를 침묵하게 만들더군.”


 


일주일가량 퀸즈 타운에 머물면서 마오리족 산장 주인이 준비해준 풀드 포크(Pulled Pork, 일종의 돼지고기 바비큐로 저온에서 장시간 구워 육질이 부드러운 게 특징임)를 먹고 독서도 하고 온천욕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아마 이런 시간이 “어떤 것은 좋았을 때(Something is good)”에 해당될 것입니다.


 



▲ 독서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부부의 모습


 


그렇다고 이번 여행처럼 이들 부부에게 늘 좋은 일만 일어났겠습니까. 저녁상 그것도 뜻 깊은 생일상 앞에서 애써 준비한 음식을 막 먹으려할 때 식탁 위에 달린 전등이 팍 나가 주위가 캄캄해진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둘 다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하기에 누군가 나서서 도와주기 전까지는 천장 높이 달린 전등을 교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게 아마도 “어떤 것은 나빴고(Something is bad)”의 경우일 것입니다.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에도 힘들어 보이지만 이들 부부는 남을 돕는데 열심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장애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일하거나 소송을 당한 장애인들을 위해 무료 변호도 해줍니다. 도움이나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남의 딱한 처지를 잘 헤아리기 때문인지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데도 이들은 익숙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름 모를 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어. 특히 등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준 사람들의 경우 내가 뒤돌아 인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얼굴조차 못 본 게 대부분이야. 이처럼 사랑이나 선의를 베푼 사람에게 그 고마움을 표시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었지. 그러고 보면 사랑이란 참으로 은밀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줄리와 이안은 도움이 꼭 필요한 순간에 주위에서 손을 내밀어 주었기에 자신들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그 고마움을 알기에 자신들도 남을 돕는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친절은 상당히 전염성이 있는 거(Kindness is very contagious)라고 강조하네요.


 



▲ 수영장 앞에서


 


“언젠가 백화점에 갔을 때였어.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을 위해 육중한 문을 잡아 주는 친절을 보고 세상이 참 따뜻하구나, 생각했지. 먼저 들어간 사람이 다음 사람을 위해 문이 닫히지 않게 잡은 채로 서있고 새로 들어간 사람은 또 다음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고 이러한 <친절 릴레이> 덕분에 휠체어를 탄 우리 같은 사람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


 


저녁식사로 태국음식을 먹은 후 집안을 구경하다 벽에 붙은 멋진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호주 원주민 친구가 그려준 거라는데 공짜 좋아하는 저로서는 당연히 그 그림이 친구 사이에서 그냥 주고받은 걸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제 지레 짐작을 눈치 챘음인지 줄리는 그 그림은 정당한 가격을 치르고 산 거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공평하다고 말했습니다. 맞아요. 장애인이라고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면 형평의 원칙에 어긋나지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줄리와 이안을 만나 많은 것을 듣고 배웠습니다.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도 있다는 걸 알았고 사랑은 은밀한 것이며 친절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사실도 깨우쳤습니다.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좋은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 줄리의 부모와 함께 한 자리


 


부딪히면 쉽게 골절되기 때문에 자주 팔목에 붕대를 감고 다닌다는 줄리, 다른 한 손으로 세척기 안에 설거지 그릇을 넣고 있습니다. 이안은 식탁을 닦고 컵들을 제 자리에 올려둡니다. 이제는 제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들 부부와 오랫동안 돈독한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너무 폐를 끼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앞마당으로 나오니 목화밭처럼 하늘은 탐스러운 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울타리 옆에 하얗게 핀 치자 꽃이 진한 향기를 풍기네요. 허리를 굽혀 한 송이 꺾어서 줄리의 휠체어에 꽂아주었습니다. 이 정도면 저도 충분히 낭만적인 사람이 아닌가요. 오늘 밤은 낭만적인 사람들이 러브레터 쓰기에 아주 좋은 밤입니다.


 


 


*글, 사진= 박일원 작가


 





박일원 작가

1995년 호주 시드니로 이주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전합니다. 호주 장애인 언론지 ‘LINK’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해외 장애인 소식을 싣고 있고 열린지평에 9년 간 ‘시드니 친구들’을 연재했습니다. 저서로 에세이집 『신은 나에게 장애를 선물했다』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합니다』가 있습니다. 현재 다문화 장애인권옹호협회인 ‘MDAA’에서 소수민족 장애인의 인권을 위해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