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백의 길] 처신은 處身이고 시는 詩다!
자 화 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어제 백제의 천년고찰 전북 고창의 선운사(禪雲寺)를 다녀왔습니다.
동백은 아니지만 선운사에 아직 남아 있는 남도의 단풍을 음미하며
선운사 옆 마을인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의 고향 질마재를 찾았습니다.
늦가을이었지만 그곳에는 국화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윤동주의 서시와 더불어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국화 옆에서>의 미당을 기리듯
노란 국화꽃이 온 마을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의 네 칸 짜리 작은 집과 어린 시절 옛날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야기꾼이었던 외할머니에게 달려가곤 하던 외갓집, 60년 해로한 부인 방옥숙 여사와 나란히 묻혀 있는 묘소, 그리고 폐교된 선운초등학교를 개조한 서정주 시문학관 앞에는 수천, 아니 수만 그루의 국화가 꽃을 터뜨리며 철 늦은 가을의 향연을 벌이고 있습니다.
시인의 생가를 돌아 나오자 작은 골목 어귀 작은 간판에 써넣은 그의 시가 오가는 이를 맞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기다림>입니다.
내 기다림은 끝났다.
내 기다리던 마지막 사람이
이 대추 굽이를 넘어간 뒤
이젠 내게는 기다릴 사람이 없으니.
지나간 소만의 때와 맑은 가을날들을
내 이상의 꿈 잎사귀.
보람의 열매였던 이 대추나무를
이제는 저승 쪽으로 들이밀꺼나.
내 기다림은 끝났다.
그는 살아 생전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즐거울 때나 기쁠 때면 가야금을 찾아 연주했다고 합니다.
시를 주겠다고 약속해서 그날 아침에 찾아가면
미당은 술에 취해 잠자곤 했는데
시를 써주기로 약조한 사실을 전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단숨에 시 한편을 써내려가곤 했답니다.
15살부터 운명한 80살까지 장장 65년 동안 1000편이 넘는 시를 썼습니다.
천재시인도 일본의 패망을 상상하지 못했나 봅니다.
27살 인 1942년 <매일신보>에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라는 이름으로 친일 작품을 쓰기 시작한 뒤 수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1943), <인보(隣保)의 정신>(1943) 등 일제를 찬양하고 태평양전쟁을 독려하는 글들은 발표하면서 친일행적이 평생 생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렇게도 뛰어난 시어와 번뜩이는 정서로 한국 최고의 시인이 되었건만 40, 50대 또다시 유신 지지와 전두환에 대한 헌시 등 또다시 독재정권을 칭송한 전력으로 늘 천재와 변절의 논란의 중심에 섰던 시인.
花蛇로 대표되는 원색적이고 강렬한 관능의 초기세계에서 출발해 한국의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미학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다가 노년에는 동양적인 원숙미를 표방한 시인.
100일 만에 천자문을 외워 고창일대에서 ‘천재났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미당은 어린 시절 세상으로 나가는 창(窓)이었던 질마재 언덕에 조용히 묻혀 있습니다.
시인 김춘수는 서정주와 그의 문학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미당의 시로서 그의 처신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그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할 수도 없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
여러분은 미당 서정주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글, 사진= 백경학 상임이사 (푸르메재단)